丹野 2010. 11. 2. 18:04

 

 

 

 

물새의 초경 / 김경주



버려진 등대에 살고 있는
개가 상공을 바라본다


해발 몇천 미터 상공에서
초경(初經)을 시작하는 물새


가장 높은 안개에 자신의 위도를 세우고
몸의 물관들을 바깥에 모두 열어놓았다
그것은 눈부신 문자의 활공 같은 것


나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수첩 속 짐승들을 몰고 와
나무로 빚은 술을 마신다


나무들이 물관을 들어 올리며
흰 김을 피워 올린다
물관 속에서 새들이 푸르르 날아오른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일본 규슈 남단 이즈미에서는 교내 철새클럽 회원인 중학생들이 모여서 10월부터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흑두루미들의 숫자를 헤아린다고 합니다. 이즈미는 세계 흑두루미의 90%가 월동하는 곳이라 그 숫자만 해도 1만 마리가 넘습니다.

중학생들이 아침부터 모여 1만 마리가 넘는 흑두루미의 숫자를 헤아리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벅찹니다. 흑두루미의 숫자를 헤아리며 중학생 시절의 겨울을 보내는 삶도 있다는 걸 알면 좀 부럽지요. 이즈음은 이즈미로 가는 흑두루미들이 구미 해평습지나 천수만 등지에 들렀다 가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올해 우리나라에 오는 흑두루미의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 기대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만….

 

-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물새의 초경(初經)    김경주

 

 


빛이 그리는 그림 위에 새들이 긴 어둑을 만들고 지나간다 

나무들이 수컷을 향해 물관을 들어올리며 흰 김을 피워올린다 

물새의 하루에 그 물관은 바깥이었다 

나는 아내(我內)가 없다 아내가 없어도 코를 파는 짐승은 인간뿐이다

물새의 초경이 시작되는 바다에 오면 물은 보라색으로 시작한다

나는 수첩 속의 짐승들을 몰고 와 이곳에서 나무로 빚은 술을 마신다

비밀이 많은 나무로 빚은 술은 물관의 냄새가 치밀어오르고

인간은 허공에서 물새의 임종을 바라보며  

가장 높은 가슴에 자신의 위도(危道)를 세운다

물 속의 산에서 검은 이파리의 향들이 올라오면

나무들이 더이상 부풀릴 수 없는 물관에

승려들은 물새의 목소리를 닮은

종(種) 하나를 달아주고 하산했다

등대는 바다 위의 절이다

바람의 불공(佛供)이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