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外 / 배용제

丹野 2010. 12. 17. 04:17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 배용제

 

TV에서 본 스타트랙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 (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 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러자 앙상한 뼈와 해골을 뒤집어쓴 내가 뒤척인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은, 바람 같은, 짐승 같은, 로보트 같은, 석탑 같은, 공룡 같은, 괴물 같은......
검은 석실에 갇혀 바둥거린다. 나는 겁에 질린
영혼을 꺼내 짓이기면서 사나운 울음소리를 낸다
출구없는 꿈을 벗어나려고
의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오, 꿈은 이토록 견고한 공포를 향해 나를 보냈던가
어쩌려고 내 생은 한동안 꿈의 의식을 건설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채 걷히지 않은 비명의 메아리를 토한다
나는 절망의 입자로 재결합된다
몸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고 있다
 

2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속 상상이 전송되고, 지친 희망들이 전송되고,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날마다 미래를 향하여 전송되고, 내가 가진 자그마한 종교가 두려움 또는 가벼운 신앙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향기에 대한 관찰 / 배용제



젖은 쓰레기 더미 위에서

치자꽃 무리가 피었다

깨진 유리병과 망가진 잡동사니 따위로

딱딱한 형태를 견뎌낸 것들,

텅빈 공기의 틈으로 주입되는 한 호흡의

향기가 되기 위해 몰입한다.

역한 핏물이 주르륵 몸 밖으로 흘러나갈 때까지

부패의 꿈 속으로 매몰된다.

그 속에서 뿌리들이 번식하는 소리

뿌리마다 주렁 주렁 매달린

꽃과 열매와 벌레와 여자와 아이들이 익어간다.

이 곳에 이르면 모든 경계는 모호해지고

날카로움도 망가짐도 눈부신 풍경이 된다.

새들 속에서 우는 잡동사니와

나뭇잎 속에서 펄럭이는 고철과

꽃들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조각

온갖 황홀한 향기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물들, 사물들 모두 응고된 공기의 흔적은 아닐지

배설물이거나 발자국이거나 혹은 눈물?

가끔씩 정체를 드러내며

차갑고 날카롭게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다.

뿌리 내린 것들은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몸을 부풀려 꿈 속 배경이 된다.

망가질수록 황홀해지는 지상의 풍경




치자꽃 향기가 코 속으로 스민다.

나는 느릿느릿 고정된 생이 형태를 망가뜨리며

수 많은 사물들 사이에 눕는다.

 

 

 
꽃들은 상처 자국에서 핀다 / 배용제



뿌리 잘린 것들의 밑바닥엔 모두 상처가 있지
조팝나무 가지가 꽂힌 그릇의 물을 갈아주며 그가 중얼거린다
봄빛을 따라간 산책길에서
주워 온 꺾인 가지 몇,
시퍼런 눈조차 뜨지 못했던 것들 어느새
새하얀 연고 같은 꽃들을 매달고 있다
무슨 보물인 양 여기는 그의 우스꽝스런 몸짓을 보면서
고아원 양지바른 곳에서
여린 가지를 뻗고 자라온 그가
남매를 두고서도 또 다른 아이를 원하는 집착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지껏 삼켰을 눈물에 대해
어쩐지 그의 웃음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눈물이 싱싱해질수록 더욱 더 선명한
조팝나무 저 꽃들,
바람에 날려 온 봄빛의 부스러기일지도 몰라
상처를 딛고 악착같이 반짝이는 딱지 같은 꽃들을
무슨 별인 양 바라보는
그의 양팔에 아이들이 매달린다
어떻게 이것들이 내게서 생겨났는지
햇살과 공기와 구름과 모든 계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그러나 꽃들이 제 몸을 벗어나기 전까지
그것들이 단단한 씨앗을 품을 때까지
아직은 잘린 상처로 눈물을 삼키며 허공을 움켜쥔
조팝나무 가지의 아슬아슬한 터전, 그의 봄날.

 

 

계단의 행방 / 배용제

 

 

핏기가 사라진 달을 물고 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사라지기 위해 계단을 상상한다

이것은 길과 바람, 혹은 구름과 발자국의 일종의 공식이다 

 

위층에 살던 여자가 떠나자

그 집으로 향하던 계단들이 천천히 증발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구름이 보내온 희고 각진 독촉장들이 쌓여갔다

누군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자

이내 계단들은 사라졌다

 

더러 남겨진 껍질들이 가끔 계단 행세를 하기도 했지만

단 한 개의 발자국 소리조차 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계단이란 증발하는 것들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모든 상상들은 쉽게 계단을 이해했다

 

 

계단으로 이룩한 상상과,

계단으로 건설된 허공을 딛고 오는 이런 세계의 나는

가끔 나를 기억해 냈다

껍질 속에서는 금세 살과 뼈가 돋아날 것이다

다시 어떤 발자국들이 계단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출입문을 잡아당길 것이다

 

잠시 세계라는 상상 속에 불을 밝히는 순간이다

또 제 옆구리에서 청구서나 독촉장 따위를 꺼낸 구름들이 달려올 것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세계도 가끔 제 그림자 속에서 실종되곤 했다

증발하지 않는 건 계단이 아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계단을 상상한다

이것은 발자국에 대한 소리의 완전한 논리이다

 

 

 

현대문학, 2010년 7월호

                     

                                                  

바람의 내부 / 배용제

 

  

믿지 않겠지만,

나는 바람의 몸을 애무해 본 적이 있다

 

멀리 몇 채의 구름이 날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쓰디쓴 체액들이 게워졌다

나는 한 방울의 정액처럼 바람의 내부로 흘러갔다

꽃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수만 년 동안 모든 짐승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자세로 피어났다

 

꿈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은밀하게 바람의 뿌리를 더듬고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내 혀 속에 바람의 씨앗들이 잉태되었다

그때부터 날마다 붉은 피의 밑그림을 그리는

구름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바람들은 가끔 사람의 몸으로 떠돌았다

 

언젠가 공원의 외진 벤치에서 흐느끼는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울음을 껴안고 소용돌이치던

그 사내의 등은

어느 바람이 흘리고 간 내부일 뿐이어서,

고대의 노을이란 주소지를 기록하지 않고는

그곳에 당도할 방법이란 없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 하나를 붙들고 밤새 울던 바람을 본 적이 있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사라진 것들 모두 꽃길을 통과했던 것처럼

사라진 것들의 연대기를 전부 기억하려는 것인지

꽃들은 버려진 발자국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길의 전설과 바람은 한 몸이 된 지 오래,

꽃이라는 고통의 빛깔과

길 위에서 희미해지고 아득해진 것들의 안부를 묻는

 
어떤 사람들은 가끔 바람의 몸으로 떠돌기도 했다.

 

 

ㅡ시안,  201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