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
붉은 것들은 슬픔이 깊다
丹野
2010. 10. 21. 21:05
프라하
붉은 것들은 슬픔이 깊다 / 김경성
해 질 녘
흥국사 일주문 너머 보이는 길이
깊다
껍질을 벗겨 내지 않은 노을 대숲에 내려앉아
휘어지는 바람의 소리
대웅전 처마, 하늘 끝으로 끌어올리고
까치마저 물이 들었는지 오동나무에서는
붉은 울음 떨어진다
풍경을 흔드는 저, 바람
대웅보전 지붕 위 찔레 줄기 흔들고 간다
꽃 필 때부터 음모를 꾸몄던 찔레 열매
저리도 붉은 것은
새의 부리에 닿아 추락하고 싶어서였겠지
제 속의 열정을 견뎌내지 못해
황홀 절정일 때
스스로 목을 꺾는 붉은 꽃들처럼
온 세상을 다 태워버리겠다는 듯
핏빛 노을,
제 속의 것 모두 범종각까지 쏟아 놓았다
목어의 마른 울음소리 잦아들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 아득해질 무렵
다 타 버린, 노을의 검은 재
일주문까지 뿌려졌다
뒤돌아보니 내 발자국마다 붉은 꽃 피어 있다
- 시집 『와온』문학의 전당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