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비 내리는 숲, 작아서 더 예쁘게 피어난 붉은 꽃들

丹野 2010. 8. 17. 13:48

 

 

 

[천리포 이야기 II] 비 내리는 숲, 작아서 더 예쁘게 피어난 붉은 꽃들




   [2010. 8. 16]

   입추 뒤에 비가 오면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무 편지로 전해드린 걸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태풍도 지나갔고, 주말엔 비도 사납게 내렸습니다. 3년 만에 한반도 내륙으로 올라온 태풍이었지요.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나마 크지 않아 다행입니다. 거개의 태풍은 8월 말까지 찾아오니, 아직은 안심하기 이르겠지요? 그러려니 생각하고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태풍 지나고 주말에 비가 또 내렸습니다. 이른 아침에 쏟아진 비는 하늘 위에 숨어 사는 누군가가 있기나 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성질 사나운 그이가 무슨 까닭에선지 심하게 화가 난 것처럼 매섭게 천둥과 번개를 내려치면서 비를 쏟아부었습니다. 조금만 가늘어진다면, 몸이 젖을지라도 바람막이나 비옷을 입고 숲 속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빗 줄기가 조금만 가늘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숲에 들어섰습니다.



   수목원의 아름다운 숲은 깊숙이 젖었습니다. 풀도 나무도 젖었고 꽃도 잎도 모두 젖어들었습니다. 나무와 눈을 맞추려니 옷도 젖고 따라서 몸도 젖어들었습니다. 처음엔 우산을 들고 걷다가 점심 즈음부터는 아예 우산을 접어놓고, 맨몸으로 걸으며 비를 맞았습니다.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졌지만 내리는 비로 꼭 젖어드는 만큼씩 온몸에 쭈뼛쭈뼛, 짜릿한 기쁨 혹은 행복감이 피어올랐습니다.

   비가 좋고, 물이 좋은 건, 내 몸 어느 깊은 구석엔가 식물성의 본능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지 싶었습니다. 빗물로 몸을 적시며, 식물에서부터 시작된 수억 년 전, 식물성의 생명 본능을 느끼는 일이 행복했습니다. 비에 젖어 촉촉해진 잎사귀들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는 얼굴에 이유 있는 미소가 번질 수밖에 없었던 건 내 깊은 식물성 본능의 발현이지 싶었습니다.



   더러는 바닥에 꽃잎을 떨어뜨린 식물도 있고, 더러는 물을 머금고 오똑하니 이파리를 치켜세운 식물도 있었습니다. 오후 들어 비는 멎었지만, 뿌리 깊숙한 곳까지 물을 한가득 머금은 식물의 환한 웃음소리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 내리는 숲의 풍경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지난 편지에서 보여드린 붉은 빛의 아주 작게 피어난 달맞이꽃 품종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작은 꽃도 분명 달맞이꽃(Oenothera odorata)의 한 종류입니다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달맞이꽃과는 생김새나 생태적 특성이 조금 다릅니다. 식물도감을 살펴보니, 달맞이꽃에 속하는 식물에는 125종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란 색 꽃을 피우는 종류에서부터 흰 색, 핑크색까지 다양합니다. 꽃 생김새는 비슷하게 컵 모양으로 피어나지만, 나팔 모양으로 피어나는 종류도 있다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식물 중의 애기달맞이꽃(Oenothera laciniata)이라는 종류는 흰색으로 피었다가 시들어 질 때에는 붉은 색으로 변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보는 식물도감(The Royal Horticulture Society 판)에는 사진의 달맞이꽃이 나오지 않네요. 인터넷을 뒤져도 쉽게 찾아지지 않네요. 최소한 정확한 학명 쯤은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Oenothera rosea 라는 종류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꽃송이가 지름 2센티미터 정도 된다 하니,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물론 저도 계속해서 찾아보겠지만, 혹시 이 꽃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신다면 제게도 알려주세요.

   식물을 찾아다니면서 가끔 우리 생각의 폭에 대해 돌아보곤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 대개는 불확실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이 실제 생활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게 문제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처럼 이런 특별한 식물을 만날 때 그런 생각은 더 깊어집니다. 만일 제가 평소에 달맞이꽃을 유심히 관찰해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이 식물을 보고 달맞이꽃과 같은 종류의 꽃이라고 최소한 짐작은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노란 색이라는 데에만 얽매인 달맞이꽃에 대한 선입견이 먼저 제 생각을 지배한 것 아닌가 싶은 겁니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세요. 역시 달맞이꽃의 한 종류입니다. 이 꽃은 Oenothera speciosa 'Rosea' 라는 이름의 달맞이꽃이지요. 우리 수목원의 암석원 지역에 무척 흔하게 피어나는 꽃이어서 사진으로 담아두긴 했지만, 이름은 알지 못했어요. 식물 관찰 노트의 ‘확인해야 할 식물들’이라는 폴더에 담아두기만 했던 꽃입니다. 달맞이꽃이라 하면 그저 노란 색의 달맞이꽃만 떠올려야 하는 어설픈 선입견이 문제였던 거죠.

   그래서 제 선생님께서는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오래 관찰해서 그 모양과 특징을 정확히 알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임을 잘 압니다. 말씀은 잘 새겨둡니다만,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마음이야 선생님 마음에 쏙 드는 우등생이 되고 싶지만, 몸은 언제나 낙제생일 수밖에 없는 천생 청맹과니입니다.



    흰 바탕의 꽃잎에서 분홍 빛이 살짝 번져나오는 이 꽃도 달맞이꽃 종류입니다. 그런데 이 꽃을 달맞이꽃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 꽃을 만난 것도 한낮이고, 또 도감에도 분명히 낮 동안 피어난다(Openning during the day)고 돼 있습니다. 우리가 ‘달맞이꽃’이라 이름 붙인 식물은 달을 마중나오듯 해 지고 나서 피어나기 때문이지만, 한낮에 피어나는 Oenothera speciosa 'Rosea'를 달맞이꽃이라고 부르기는 좀 어색하지요.

   그러나 네 장의 꽃잎이 둥근 컵 모양으로 피어나고, 꽃술 가운데 암술머리가 넷으로 갈라지며 피어나는 모습은 영락없이 달맞이꽃입니다. 위쪽의 사진에는 아직 암술머리가 벌어지기 전이어서, 넷으로 갈라진 것을 볼 수 없지만, 실제로 이 꽃의 암술머리는 나중에 다른 달맞이꽃 종류의 꽃처럼 넷으로 갈라집니다. 처음에 보여드린 붉은 색의 달맞이꽃 종류를 다시 한번 보세요.



   역시 암술이 넷으로 갈라진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크기도 다르고 빛깔도 다르지만, 생김새가 매우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삐죽 솟아올라와 넷으로 갈라진 암술 뿐 아니라, 암술보다 작게 둘러선 수술이 여덟 개인 것까지 똑같습니다. 이 작은 달맞이꽃도 Oenothera speciosa 'Rosea'처럼 한낮에 피어납니다. 이 사진 역시 땀을 뻘뻘 흘려야 했던 한낮에 땅바닥에 코가 닿을 만큼 몸을 낮추고 찍은 사진입니다.

   달맞이꽃의 영어 이름은 ‘밤에 피는 앵초(Evening Primrose)’입니다. 우리가 달맞이꽃이라 부르는 것과 통하는 이름입니다. 달맞이꽃이라는 예쁜 이름 때문에 우리 토종 식물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남아메리카의 칠레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귀화식물입니다. 처음 우리에게 들어왔을 때, 영어 이름을 참고하고, 또 달이 떠오를 때 피어난다는 특징에 기대어 우리가 붙인 이름입니다. 달맞이꽃은 번식력이 뛰어나 때로는 같은 사구 지역에서 자라는 우리 토종 식물의 생태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히 사구식물 보존과 관련한 일을 하는 분들에게는 골칫거리인 식물입니다.



   꽃 송이가 작아서 더 예쁜 식물, 게다가 예쁜 우리말 이름을 가진 식물을 이야기하려니, 금꿩의다리(Thalictrum rochebrunianum)를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사진으로 그가 얼마나 예쁜지를 다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창 피어난 금꿩의다리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지만, 작은 꽃일수록 사진으로 표현하는 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게다가 얘는 키도 커요. 식물도감에는 줄기가 70~100센티미터로 자란다고 돼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잘못인 듯합니다. 제가 아는 금꿩의다리는 언제나 저보다 키가 컸거든요. 아마 2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 아닌가 싶습니다. 이만큼 크게 자라지만 금꿩의다리는 나무가 아니라,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한해살이를 마치고는 땅 위로 돋아나 있던 잎이나 줄기가 모두 사라진다는 거죠.



   큰 키로 자라는 금꿩의다리의 줄기는 가느다랗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늣한 바람에도 끊임없이 살랑거릴 수밖에요.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다가 한숨만 쉬어도 꽃을 포함한 줄기까지 흔들거릴 정도입니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몸을 고정한 채 사진을 찍어도 좋은 사진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또 옆의 큰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 어두운 자리에 있다는 것도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활짝 피어난 꽃이 예쁘기도 하지만, 꽃잎 열기 전에 5밀리미터 쯤 되는 작은 구슬 모양으로 동그랗게 맺히는 꽃봉오리도 참 예쁩니다. 그게 마치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같아요. 빛깔까지 꼭 닮았습니다. 그 조그마한 구슬이 드디어 자기가 좋아하는 햇살을 받으면 네 장의 꽃받침, 즉 화피(花被)로 저리 예쁘게 피어나는 겁니다. 가운데에서 무수하게 돋아난 노란 꽃술은 또 어떤가요?



   금꿩의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건 바로 이 노란 꽃술 때문입니다. 우리 식물 가운데에는 꿩의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식물이 꽤 있습니다. 일테면 꿩의다리, 긴잎꿩의다리, 꽃꿩의다리, 산꿩의다리 등이 그런 식물들이지요. 그 중에 특별히 ‘금’을 붙인 게 바로 저 노란 꽃술 때문이라는 겁니다. 꿩의 다리라 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가느다란 줄기로 높다랗게 자란 이 식물이 마치 가느다란 다리로 큰 몸뚱아리를 버티고 서는 꿩을 닮았다고 생각한 때문일 겁니다.

   금꿩의다리 꽃은 특히 한데 모여서 피어나지 않고 여러 송이가 뿔뿔이 흩어지며 보랏빛 점을 숲의 초록 풍경에 점점이 새겨놓은 듯, 은은한 아름다움을 갖췄습니다. 흔치 않은 독특함입니다. 금꿩의다리는 우리나라의 중북부 지방의 산지(山地)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남부 지방에서도 잘 자란다고 합니다. 보면 볼수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우리 토종 식물입니다.



   작은 꽃을 이야기하다보니, 우리 수목원에 지금 지천으로 피어난 닭의장풀(Commelina communis)꽃도 돌아보게 됩니다. 흔해서 잘 돌아보지 않게 되는 꽃이지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인 파란 색으로 피어나는 닭의장풀 꽃입니다. 다음 편지는 그래서 닭의장풀 꽃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그러셨던 것처럼 다음 편지도 관심 갖고 기다려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