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 지난 뒤, 불볕 무더위를 반기는 나무들의 가을맞이
[천리포 이야기 II] 입추 지난 뒤, 불볕 무더위를 반기는 나무들의 가을맞이
[2010. 8. 9]
낮이나 밤이나 아직은 뜨거운 염천 무더위가 식지 않았지만, 달력으로는 입추 말복 다 지났습니다. 지난 주말에 쏟아진 소낙비로 열기가 가라앉나 기대했지만, 열기는 그대로이고, 습기만 높아져서 찜통 더위는 더 하는 듯합니다. 입추(立秋)는 가을에 들어섬을 알려주는 표지이지요. 그러나 입추 지나고도 더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잔서(殘暑)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거겠죠. 입추 뒤에 이어지는 더운 날씨를 가리키기 위해 지어낸 옛말일테니까요. 이 말에는 아마도 더위를 빨리 물려보내려는 생각이 가득 담겼을 겁니다.
입추 지나고는 날씨가 맑아야 곡식이 잘 익습니다. 이때에 비가 많이 오면 곡식들에게 좋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입추 뒤에 비가 사흘 이상 내리면,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고 전합니다. 곡식은 아니지만 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맑고 햇살 많은 날씨가 이어져야 결실의 계절을 풍요롭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열매 뿐 아니라, 이 즈음의 날씨가 맑아야 가을 단풍도 고와집니다.
사진은 지금 한창 특별한 모습으로 익어가는 모감주나무(Koelreuteria paniculata)의 열매입니다. 7월 쯤부터 가지 끝에 노란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모감주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모감주나무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에 자생지가 있는 명백한 우리 토종 식물입니다.
천리포수목원과 가까운 안면도에는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된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습니다. 모감주나무 자생지 가운데에는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곳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전남 완도의 대문리와 포항 발산리에도 천연기념물 제428호 제371호로 지정된 군락지가 있지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자생지 외에 최근에는 서해안의 백령도와 내륙인 충북 월악산 중턱에서까지 저절로 자라는 모감주나무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우리 토종 나무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중국에서는 모감주나무를 훌륭한 선비의 묘지 옆에 심었다고 전합니다. 품위 있는 나무인 때문이라고 하는데, 근거는 그리 뚜렷하지 않아요. 물론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야 다르겠지만, 모감주나무를 품위 있는 나무라고 여기는 근거가 좀 아리송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양으로 넘어가서도 모감주나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나무입니다. 영어로는 ‘Golden Rain Tree’라고 부릅니다. ‘황금 비 나무’라는 꽤 근사한 이름을 얻은 겁니다.
황금 비 나무라는 건 7월에 피어나는 노란 꽃 때문입니다. 7월에 키 큰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 가운데에는 가장 화려한 꽃이 바로 모감주나무의 꽃이지요. 꽃은 보름 넘게 가지 끝에 달려있다가 떨어지지요. 그러고 나면 사진에서 보시는 독특한 생김새의 열매를 맺습니다. 길쭉한 꽈리 모양으로 맺히는 이 열매의 안쪽은 텅 비어있는 듯한데, 세 장의 껍데기 안쪽에 각각 한 알이거나 두 알의 동그란 씨앗이 맺힙니다. 이 씨앗이 다 익으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까만색이 되는데, 이걸 절집에서는 염주 알로 쓴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무가 흔하지 않아서, 모감주나무 씨앗으로 만든 염주는 대개 큰스님들이 쓰신다지요.
이번에는 히말라야시다라고도 부르는 개잎갈나무(Cedrus deodara)의 열매입니다. 개잎갈나무의 ‘개’는 ‘가(假)+ㅣ’로 이루어진 말로, 우리 나무 이름 가운데 앞에 이 ‘개’자가 들어간 나무가 적잖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가짜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박하를 닮았지만 박하가 아니면 개박하, 망초를 닮았지만 망초가 아니면 개망초, 다래이면서 다래가 아니면 개다래, 느삼이면서 느삼이 아니면 개느삼이라 부르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개잎갈나무는 ‘가짜 잎갈나무’라는 뜻입니다.
개잎갈나무는 우리나라 금강산 이북 지방에서 자생하는 잎갈나무와 생김새는 영락없이 닮았지만, 가짜라는 겁니다. 이깔나무라고도 부르는 잎갈나무는 가을 되면 잎을 떨어뜨리는 낙엽성 나무이지요. 나무의 이름도 잎을 가는 나무라 해서 붙은 거고요. 그런데 개잎갈나무는 잎갈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을 되어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상록성 나무입니다. 그래서 가짜 잎갈나무라 한 거죠.
어쩌면 이 나무는 개잎갈나무라는 이름보다 히말라야시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 이름으로 뒤에 ‘시다(cedar)’라 부르는 나무 가운데에는 히말라야시다를 비롯해 레바논시다, 아틀라스시다, 사이프러스시다 등이 있지요. 이는 모두 소나무과의 개잎갈나무속(Cedar)에 속하는 나무로, 지리 조건에 따라 나타난 변종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즉 ‘시다’ 앞에 붙은 히말라야, 레바논, 아틀라스, 사이프러스 는 이 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을 이야기하는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중남부 지역에서 심어 키우는 히말라야시다가 우리 수목원에서도 늠름한 자태로 자라고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가장 먼저 지은 한옥인 ‘해송집’ 뒤편 언덕 마루에 서있는 키 큰 나무가 바로 히말라야시다입니다. 족히 10미터는 넘게 자란 이 나무의 가지 위에도 가을을 준비하는 열매가 도톰하게 올라왔습니다. 히말라야시다의 열매는 영그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즉 올 가을에 꽃이 피고나면, 천천히 열매를 키워서, 이듬해 가을에 완전히 영그는 겁니다. 사진에 보이는 열매는 그러니까, 지난 해에 꽃가루받이를 마치고 한햇동안 준비한 결실이지요.
식물의 여러 모습 가운데 꽃이 가장 예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꽃 못지 않게 열매도 참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앞에서 이야기한 히말라야시다처럼 한해 내내 조금씩 키워나가는 열매가 있듯이, 차츰차츰 모양과 빛깔을 바꿔나가는 변화를 보여주어서 열매를 바라보는 건 더 재미있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그렇게 신비로운 변화를 보이는 열매 가운데에 참빗살나무(Euonymus hamiltonianus subsp. sieboldianus)의 열매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이 참빗살나무가 맺기 시작한, 아직 덜 여문 열매입니다.
6월에 조롱조롱 피어났던 자그마한 꽃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막 돋아난 새 열매입니다. 넷으로 갈라진 걸 보면 이 열매의 안쪽에는 아마도 네 알의 씨앗이 막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겠지요. 이 무더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열매는 안쪽의 씨앗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과 땅으로 빨아올리는 물을 배불리 먹이면서 차츰차츰 몸피를 키울 겁니다.
몸피만 키우는 게 아닐 겁니다. 자신에게 가장 맞춤한 빛깔과 향기까지 지니게 되겠지요. 1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작은 열매 안쪽에는 겉 모양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네 알의 씨앗이 움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명한 자홍색으로 몸단장을 하기에 지금 무척 바쁩니다. 시월이나 십일월 정도 되면 저 자그마한 열매는 무르익어서 스스로 입을 벌리고 자신이 키운 씨앗이 얼마나 예쁜 지를 드러낼 겁니다. 작지만 매우 크고 아름다운 변화이지요.
혹시 사철나무(Euonymus japonicus)의 열매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참빗살나무의 열매는 조금 작지만, 꼭 사철나무의 빨간 열매를 연상하게 합니다. 사철나무와 참빗살나무는 같은 노박덩굴과(Celastraceae)에 속하는 나무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과에는 화살나무(Euonymus alatus)와 회나무(Euonymus sachalinensis) 등이 속합니다. 그러고보니, 회나무의 열매도 참빗살나무나 사철나무 열매와 비슷하네요.
참빗살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글자 그대로 참빗살을 만드는 데에 쓰인 까닭입니다. 이제는 참빗을 보기가 어렵습니다만, 예전에는 여인의 몸단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지요.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던 참빗을 요즘은 관광지의 기념품이 되었더군요. 목재가 단단해서 참빗의 가는 살을 만드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던 모양입니다. 같은 이유로 바구니를 만드는 데에도 대나무만큼 많이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녁 되어도 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는 이 여름의 꼬리(‘꼬리’라 부르는 게 성급해 보입니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를 수목원의 모든 식물들은 반가이 맞이하는 듯합니다. 뜨거운 볕 받으며 한층 도톰해진 잎사귀도 이제는 차츰 열매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서서히 잎의 빛깔을 바꾸기도 하고 또 많은 나무들은 잎을 떨구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이제 다시 나뭇가지에서 도담도담 자라는 열매를 더 유심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엊그제 수목원 식물을 돌아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식물을 하나 알게 됐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인데요. 달맞이꽃(Oenothera odorata)과 같은 과에 속하는 달맞이꽃 품종입니다. 수목원 친구들이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저 꽃의 존재는 알지 못했을 겁니다. 키가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낮은 키의 초본 식물인데, 꽃 한 송이의 크기가 7~8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앙증맞은 꽃입니다. 혹시 스쳐지나는 눈길에 뜨였더라도 그냥 무신경하게 지나갔을 식물이지요.
경배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고서야 겨우 이 작은 달맞이꽃 의 꽃송이와 눈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한 송이씩 연보랏빛으로 피어난 이 작은 꽃송이는 건듯 불어오는 바람에도 사정없이 하늘거리는 탓에 눈을 맞추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곁에서 커다란 책을 펼쳐서 바람을 막아준 친구가 아니었다면 사진 한 장 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작은 꽃이었어요.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 이 꽃 이야기 더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맨 끝의 사진은 참 맛난 열매를 맺는 Acca sellowiana 의 꽃입니다. 이 꽃이 지고나면 페이조아라는 열매가 맺힙니다. 이 나무는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지만, 추위에도 강해서 우리 수목원 안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이지요. 단 맛이 강한 아주 특별한 열대 과일입니다. 열매를 이야기하자면 빼놓기 어려운 훌륭하고 기특한 나무입니다.
지난 주말이 삼복의 끝인 말복이었지요. 복달임은 잘 하셨는지요? 아직 여전한 무더위 잘 이겨내시고 나무처럼 튼실한 결실 든든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