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색에서 짙은 분홍색까지 황홀한 빛깔의 만병초
[천리포 이야기 II] 흰 색에서 짙은 분홍색까지 황홀한 빛깔의 만병초
[2010. 6. 15]
온통 축구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리의 젊은이들이 '넬슨 만델라' 이름이 붙은 푸른 운동장에서 혈기 방장하게 냅다 뛰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참으로 통쾌하고 시원스럽고……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유쾌함이었습니다. 우리 사는 일이 언제나 그들처럼 거침없었으면 싶네요. 앞으로 며칠 동안은 내내 그렇게 축구 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겠지요. 이처럼 평화롭고 유쾌한 일들만 가득한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예쁜 꽃 사진을 앞에 놓고도 축구 이야기를 이리저리 들춰보게 되네요. 그 가운데, 알베르 까뮈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까뮈는 열일곱 살 때까지 축구 선수였어요. 그때만 해도 까뮈는 장래의 꿈이 훌륭한 골 키퍼였다고 합니다. 결핵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운동을 계속할 것이었지요. 문학의 길에 들어선 그는 나중에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답니다. 그가 축구에서 배웠다는 도덕과 인간의 의무, 그걸 한번 더 깊이 짚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만병초(Rhododendron brachycarpum)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수목원의 만병초 품종들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해서 몇 자 더 적어 올립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여러 품종의 만병초가 있습니다. 그들을 한데 모아 키우는 자리를 '만병초원'이라고 부르지요. 큰연못 가장자리가 그 곳입니다. 용버들(Salix matsudana for. tortuosa)을 닮은 뱀버들(Salix alba 'Snake')이 우뚝 서있는 연못 모퉁이를 돌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해당화(Rosa rugosa)도 함께 있지요.
만병초는 어제 말씀 올렸듯이 다양한 종류의 품종이 있습니다. 꽃이 화려하다 보니, 관상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물이다 보니, 다양한 품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나라에 만병초가 처음 들어온 것은 약재로 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병초는 약재로서의 가치 못지 않게 관상용으로서의 가치도 높은 식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철쭉(Rhododendron schlippenbachii) 꽃도 화려하고 예쁜데, 그 꽃이 열 송이 넘게 한데 모여서 피어나니 얼마나 화려하겠어요. 그 화려한 모습을 사람들이 그냥 둘 리 없지요.
올 들어 우리 수목원의 만병초가 꽃잎을 연 것은 지난 4월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만병초 꽃봉오리에서 붉은 꽃잎을 찾은 건 4월23일 저녁이었습니다. 그 날 낮, 한참 주변을 돌아다니면서도 만병초 꽃이 올라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대개는 5월 넘어야 피어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방문객들이 다 돌아간 늦은 저녁, 아직 남은 햇살을 따라 천천히 다시 연못 주위를 돌아보는데, 우리 수목원의 지킴이 한 분께서 제게 '만병초 꽃 봉오리 올라온 것 보셨어요?'라고 하시기에 깜짝 놀라 다시 찾아보게 됐지요.
빨간 꽃봉오리였습니다. 지난 5월 17일치 편지에서 보여드린 빨간 꽃봉오리가 바로 올에 제가 처음 만난 만병초 꽃봉오리였습니다. 이렇게 처음 발견할 때의 기쁨은 활짝 피어난 꽃을 볼 때와 또다른 느낌입니다. 예쁘게 피어나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는 꽃들에게 힘을 더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한해 동안 쌓아온 그리움에 대한 보상을 받는 듯한 느낌도 있지요. 또 '발견의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꽃봉오리를 열고 얼마 뒤, 5월 들어서면서부터 만병초원에 서있는 다양한 품종의 만병초들이 일제히 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꽃의 생김새는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서로 비슷하지만, 빛깔은 무척 다양했어요. 모두 십 여 그루 정도 되는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똑같은 색깔로 피어난 꽃은 하나도 없어요. 어쩌면 그리 다양한지요.
보는 분들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저에게 가장 살갑게 다가온 만병초 꽃은 오늘 편지의 맨 위에 두 장의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분홍색 꽃의 만병초 품종입니다. Rhododendron 'Brigitte' 라는 이름을 가진 품종인데, 분홍 색의 꽃잎이 더 없이 포근해 보였습니다. 다른 품종에 비해 이 나무는 비교적 낮은 키여서인지, 가지를 옆으로 넓게 펼쳤습니다. 그리고 가지 끝에서 꽃 송이를 피워냈는데, 그 중 햇살을 받아 곱게 빛나는 하나의 꽃송이가 더 없이 예뻐보였습니다.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지요.
어제의 나무 편지에서도 이 포근한 분홍 빛의 '브리짓만병초'는 보여드렸습니다. 어제 맨 끝에 첨부했던 사진이 바로 브리짓만병초였습니다. 분홍 빛이 잔잔하게 배어나오는 꽃 송이 가운데에서는 짙은 초록 빛 반점으로 벌 나비를 불러모으기 위한 활주로를 선명하게 냈습니다. 초록의 활주로 초록 물감이 번진 듯, 주변으로 연둣빛이 배어나오면서 꽃잎의 분홍 빛과 절묘하게 어우러졌습니다. 여러 만병초 가운데에 단연 제 마음을 끌어들이는 꽃이었습니다.
옅은 분홍 빛의 만병초 꽃 곁에는 흰 색의 만병초 품종이 있습니다. 순백의 하얀 꽃을 활짝 피운 이 나무는 Rhododendron Unique 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름 그대로 유니크한 흰 색입니다. 진달래나 철쭉도 붉은 빛이 많긴 하지만, 흰철쭉과 흰진달래가 더 예쁘고 좋지 않으시던가요? 붉은 꽃이 정열적이라면, 이 하얀 꽃은 그야말로 순결의 상징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또 우리 민족이 오래도록 귀하게 여겨온 색깔이기도 하겠지요.
셋째 넷째로 이어진 두 장의 사진이 바로 유니크한 흰 꽃의 Rhododendron Unique 입니다. 혹 저도 '양화소록'의 강희안처럼 나무에 품계를 매길 기회가 있다면 단연 흰 꽃을 붉은 꽃의 위쪽에 놓게 되지 싶네요. 물론 흰 꽃만 좋은 건 아닙니다. 붉은 빛의 만병초도 나름대로의 정열적인 멋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바로 위의 다섯째 사진과 아래의 여섯째 사진이 바로 그런 붉은 꽃의 멋을 가진 만병초입니다. Rhododendron Smithii Group 라는 이름의 만병초이지요. 나무 앞에 '스미스만병초'라는 이름의 표찰을 크게 세워두어서 금세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스미스만병초도 어제의 나무 편지 뒷 부분에서 보여드렸습니다. 나뭇가지마다 붉은 꽃으로 마치 야구공 크기만큼 한데 모여 피어난 꽃 뭉치가 참 화려합니다. 꽃송이 바로 아래의 잎사귀도 재미있습니다. 꽃을 더 돋보이게 할 심사였을까요? 마치 리본처럼 혹은 나비넥타이의 아래 깃처럼 빳빳하게 일제히 땅을 바라보고 내려뜨린 모습 말입니다. 저 모양은 굴거리나무에서도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굴거리나무를 만병초로 혼동한 남획꾼들이 굴거리나무를 채취해갔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끝으로 보여드리는 일곱째 여덟째의 두 사진도 역시 어제 보여드린 만병초 품종입니다. Rhododendron fortunei 'Lu Shan'라는 이름의 이 나무는 만병초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돋보이는 나무이지요. 이 나무는 작은연못 가장자리에 서있는 조구나무를 돌아 전망대 쪽으로 오르는 오솔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길 가장자리에 서있는데, 만병초 가운데에서는 크게 잘 자란 나무에 속합니다.
대략 4미터 가까이 자란 나무인데다 나뭇가지의 품도 넉넉해 꽃이 피어날 즈음에는 장관을 이룬답니다. 꽃은 흰 색이라 할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아주 조금씩 분홍 빛이 배어나온 걸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가 막힐 만큼 오묘한 색깔,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의 빛을 인공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이틀에 걸쳐 만병초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어떠셨어요? 참 멋지고 화려한 꽃인 거 맞죠? 축구 때문에 밤잠 설치는 날이 며칠 동안은 계속 되겠지요. 밤잠 설치고 피곤한 것보다 더 신나는 일 계속 되길 바라게 됩니다. 와중에 부디 건강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