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삼킬 수 없는 것들 外 / 나희덕

丹野 2010. 8. 3. 08:59

   

 

 

삼킬 수 없는 것들 / 나희덕

 

  

내 친구 미선이는 언어치료사다
얼마 전 그녀가 틈틈이 번역한 책을 보내왔다
「삼킴 장애의 평가와 자료」


희덕아, 삼켜야만 하는 것, 삼켜지지
않는 것, 삼킨 후에도 울컥
올라오는 것… 여러가지지만
그래도 삼킬 수 있음에 늘 감사하자. 미선.


입 속에서 뒤척이다가
간신히 삼켜져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것,
기회만 있으면 울컥 밀고 올라와
고통스러운 기억의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삼킬 수 없는 말, 삼킬 수 없는 밥, 삼킬 수 없는 침,
삼킬 수 없는 물, 삼킬 수 없는 가시, 삼킬 수 없는 사랑,
삼킬 수 없는 분노, 삼킬 수 없는 어떤 슬픔,
이런 것들로 흥건한 입 속을
아무에게도 열어 보일 수 없게 된 우리는
삼킴 장애의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다


미선아. 삼킬 수 없는 것들은
삼킬 수 없을 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
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 희덕.

 

 

 

 

오분간 /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버릴 生,

내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겟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로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草墳 / 나희덕



남쪽 바다 외나로도 고갯길에서
초분 몇을 보았다

파도소리 들으며 오손도손 볕을 쬐는
풀무덤들이 내게는
왜 세 척의 배로 보였는지

바다를 보고 싶어서
조기떼 우는 소리에 뒤척이고 싶어서
돌 구르는 언덕 위에 앉아 있는
통나무 위에 관을 얹고
볏짚날개를 마른 돛처럼 펼치고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떠날 것 같은
푸른 생솔가지 꽂고
저승길 저어가는 배처럼 보였는지

살 썩은 물은 땅으로 흘려 보내고
마른 뼈만 마른 뼈만
바람에 지푸라기 날리며 가는 배

 

 

 

 

저 물결 하나 / 나희덕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잔물결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을 빼서 서울을 떠난 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한강.
어제의 내가 그 강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한 뼘쯤 솟았다 내려앉는 물결들.
서울에 사는 동안 내게 지분이 있었다면
저 물결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하나 일으켜
열 번이 넘게 이삿짐을 쌌고
물결 하나 일으켜
물새 같은 아이 둘을 업어 길렀다
사랑도 물결 하나처럼 
사소하게 일었다 스러지곤 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도
저 낮은 물결 위에서였다
숱한 목숨들이 일렁이며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
뒤척이며, 뒤척이며, 그러나
한 번도 같은 자리로 내려앉지 않는
물결 위에 쌓았다 허문 날들이 있었다
거대한 점묘화 같은 서울.
물결 하나가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저 물결을 일으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새는 날아가고 / 나희덕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 밖은 고요해
그래도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를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 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 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너는 들어본 적 있니?
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가 아직 깨지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고요해
괄호처럼 입을 벌리는 빈 접시,
새는 날아가고
나는 다른 심장들을 훔치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찬비 내리고 / 나희덕
-편지1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와온에서 /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 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와온..전남 순천만의 바닷가 마을

 

 

 

 

 

손의 마지막 기억 / 나희덕


인도 사리스카 숲 속
새들의 삼거리에 이러렀다
새와 사람이 오래 전부터 만나온 곳인지
인기척에 금세 새들이 날아들었다
나는 청포도 몇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새 한 마리가 내 손에 내려앉는 순간
그 발톱의 감촉에 놀라
움찔, 포도알을 땅 위에 흩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다시 놀랐다
아, 이제까지 시인 노릇 헛했구나!
새에 대한 사랑과
새에 대한 무수한 노래,
내 몸은 순식간에 그 모든 걸 배반했다
가장 정직한 고백을 몸에게서 들었다
더운 피가 도는 짐승의 등을
이 손으로 쓰다듬어본 게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이 손으로 대체 무얼 만지고 살아왔는지
손의 마지막 기억을 찾아
나는 사리스카 숲 속을 오래도록 헤매었다

 

 

 

 

여,라는 말 / 나희덕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가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고도 부를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아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영영 물에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여도 있다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끊임없이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도 여,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44분의 방이
5시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끼 / 나희덕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닮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

물 속에서만 자라나는
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

 

 

 

 

흐린날 에는 /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밝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어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출처 / 시하늘 - 감사합니다.

 

 

  Childhood Memory / Band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