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사라진 것들의 목록 外 / 천양희

丹野 2010. 7. 3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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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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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 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 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뒤편 /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배경이 되다  / 천양희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 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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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새  / 천양희


물결이 먼저 강을 깨운다 물보라 놀라 뛰어오르고
물소리 몰래 퍼져나간다 퍼지는 저것이 파문일까
파문 일으키듯 물떼새들 왁자지껄 날아오른다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 밑이다
몇번이나 강 건너 하늘을 본다
하늘 끝 새를 본다
그걸 오래 바라보다
나는 그만 한 사람을 용서하고 말았다
용서한다고 강물이 거슬러 오르겠느냐
강둑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발끝이 들린다
내가 마치 외다리로 서서
몇시간 꼼짝 않는 목이 긴 새 같다
혼자서 감당하는 자의 엄격함이 저런 것일까

물새도 제 발자국 찍으며 운다
발자국, 발의 자국을 지우며 난다


 

 오래 젖은 집   /  천 양 희


  비 오는 날입니다 골목이 수런대면서 집들이
  들썩거립니다 지붕은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마당을 내려다봅니다 십 년을 살던 집 집들이
  오래 그늘을 늘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둑해
  있습니다 근심 많은 것들의 하루가 길어집니다 이제
  어디에 머물든 두렵지 않습니다 아직 산정에 닿지 못한
  사람들이 언덕을 쓸며 지나갑니다 한때의 푸른 잎들
  피었던 거 다 어디로 쓸렸는지 몸 한쪽이 기우뚱합니
다 능선 따라
  가는 산길 높았으나 하산하는 물길 낮습니다 오늘까지
우릴
  지켜준 건 나무처럼 곧은 마음이었습니다 슬픔도 견뎌
내면
  어려움 속에서도 힘이 된다는 걸 아는 자 있을
  것입니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소리 골짜기만큼
  깊어집니다 제 속에다 간절함을 품은 까닭입니다 묵묵한
  바위들은 비에 젖는 생을 모를 것입니다 나는 빗소리
  한 줄 당겨놓고 기다립니다 제 생(生) 볕들기 기다리는
것이
  너무 오래 젖은 집일 것입니다
  비 오는 날입니다 젖은 집들 위로 하늘이 조금
  밝아지고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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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芒草)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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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있던 자리 /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새가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갈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인용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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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한 장 붙여서 /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한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 볼 때까지
험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한
한 사람의 눈먼 자 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 보다
더 사랑한 적이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장 붙여서 부친적이 있나

 

 

사람들 / 천 양 희 

 

 

 논둑길 걷다 누군가 무르팍을 툭, 친다 풀잎이다 풀잎 속 풀무치

다 풀무치 눈이 퍼렇다 풀 탓이다 풀물 든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

에는 풀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다 풀 베듯 베이는 사람이 있다

 

 세종로 지나다 누가 머리통을 텅, 친다 종각이다 종각 속 종이다

종이 울지 않는다 세상 탓이다 종 치듯 세상을 치고 싶다 세상에는

종소리보다 더 소리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절필한 종소리 재창하

고 싶은 날들이 있다 종소리 울리듯 절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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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의 말 / 천양희


백자를 굽는 것은
마음을 빚는 일이라고
마음 빚는 일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우는 일과 같다고
타들어가는 불꽃 보며
타들어가는 세월을 보는 것이라고
호반으로 떠오르는 달빛을 방 안까지 맞아들이는 일이
아침저녁 물가에 앉아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는 일과 같다고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듣는 일이
마음 빚는 일이라고
도공이 말하네


도예가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먼저 마음자리부터 살펴야 한다고
흙을 주무르는 손이
제 마음의 모양대로 빚어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도공이 말하네

백자가 마음 빚는 일이라면
우리도 제 삶을 빚는 도공들이라고
달빛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꽉 찬 삶을 사는 일이라고
사는 일이 먼저이고 만드는 일이 그 다음이라고
도공이 말하네

도공처럼 되긴 아예 틀린 생이여
일류 도공을 꿈꾸던 날이
우리에게는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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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 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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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 외등 / 천양희

 

 

나는 오래 여기 서 있었습니다 외동 1번지

다시는 저 다리 위에 저 정거장엔 가지 않으리라

내려가서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리라

갈퀴별자리 옮겨 앉는 날 밤이면

내 청춘의 붉은 바퀴 굴러가다 멈춘 것 보입니다

가슴을 조금 움직여 두근거려 보지만

그 길 따라 오는 사람 있겠습니까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

세상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늙은 느릅나무 뒤에는 주름진 황톳길이 구불텅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개들 옆으로

저 혼자 젖는 취객들이 많이

어두워져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나는

신열에 들뜬 듯 머리를 싸매고

풀섶에 숨어 우는 벌레들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다 적기로 합니다

산간벽지 떠돌다

잔가지 생잎 쓸린 잡풀들

몰래 숨어든 외동 1번지 느릅나무 곁에서.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어처구니가 산다 / 천양희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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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Hoppe-'The Po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