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 2010. 7. 20. 18:59

 

 

      바람의 강 外 / 임동윤

 


바람의 강 / 임동윤

 


바람 많은 강을 거슬러온 세월은

죄다 주름이 되었을 것이다

마른번개와 천둥의 밤, 잔가지들이 흔들려

단단한 어깨 축축 늘어졌을 것이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당신,

궤도에서 벗어난 종아리마다 실핏줄 툭툭 터져

세계지도를 그려 넣고 있다

검버섯 환한 팔순의 폐답, 더 이상

펌프질이 필요 없는 삭정이 같은 팔다리

얼굴 가득 인화된 팍팍한 생의 물결무늬

어쩌면 저 문양은 내가 빨아먹고

혹은, 갉아먹다 버린 잎맥인지도 모른다

만지면 금세 풀썩 사라질 것 같은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작달막한 몸과 말라비틀어진 가지

바람 많은 길을 참 많이 걸어와

이젠 온통 거미줄 뒤덮인 폐가다

그런데도 아직 그 몸에서는

장미꽃보다 더 진한 젖냄새가 난다

푸른빛 남아도는 내 몸에서는

어떤 빛깔의 향기와 무늬도 없는데

바람 많은 강을 거슬러온

그 몸에서는

여전히 나무 타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 계간 《시에》 2010년 여름호

 

 

 

 

 

적막 한 채  / 임동윤


누구든지 출입을 허락한다는 듯

무너진 싸리 울타리 너머

털썩 주저앉은 너와집 한 채 있다

감나무는 말라죽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깔고 앉는다

조금씩 삭아 내리는 내력으로

뒤뜰 대숲엔 바람소리만 스산하다

조금씩 그 시간을 돌아보기로 한다

잡초 황망히 뒤집어쓴 우물을 돈다

반쯤 내장을 비운 장독과 댓돌들

사금파리조각은 눈을 찌르고

속살을 다 드러낸 처마 밑에서

거미들만 알을 까고 새끼를 친다

오직 천근무게의 주춧돌로 남은 적막들

울안을 지나간다

폭삭 내려앉은 대문 앞에 선다

눈보라에 견디지 못한 굴피지붕

이미 판자는 떨어져 나갔다

웃자란 풀들이 적막을 내뿜는다

휙휙 바람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탓일까

멧새 몇 마리 날아와 재잘거린다

이젠 눈 뜨고도 늙어가는 집

서둘러 고요 속을 빠져나온다

 

 

■ 계간 《시에》 2010년 여름호


   

 


 

저무는 풍경에 서다 / 임동윤

 

 

처마 밑의 종소리는 아직도

녹스는 중, 철봉도 휘어지고

정글짐도 잠겨버리고 국기게양대엔

희미한 기억들이 펄럭거린다

뎅뎅거리던 종소리를 따라 움직이던

발길들, 다시 추억 따라와야 한다

유관순 누나 치마폭을 붙잡고 환삼덩굴이

해바라기와 키를 맞추는 오후,

한글 자모의 그림자로 남아

교실 한 귀퉁이에 앉아 있다가

산그늘로 깊어진다

버찌나무 그늘에 남아 휘파람을 불며

어린 나의 손금만 뻐끔뻐끔 들여다보는데

모든 왔던 것들은 꼬리를 내리고

낯익은 얼굴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서 불러내는 이름들

저녁 어스름만 불꽃같고

눈 감으면 신혼 같은 내가 그립다

 

■ 계간 《다층》 2010년 여름호

 

 

 

 

풍경은 쑥쑥 자란다 / 임동윤


 

지붕 위엔 벌써 익모초가 자라나 있다

마른 우물은 그늘진 것들만 찾아와 일가를 이루고

그 옆에서 앵두나무만 빨갛게 몸이 익는다

이따금 바람이 썩은 울타리를 타넘고 오면

오동나무 말라죽은 가지 하나가 거문고소리를 낸다

먼지 뽀얀 툇마루가 조릿대 울음소리로 늙어가고

떨어진 문종이엔 빗물자락이 물들어 있다

태엽이 끊긴 시간들이 유적처럼 쌓여가고

무당거미와 그 그물에 하루살이만 파닥인다

한낮인데도 으스름만 면적을 넓혀가는 집

기둥이며 서까래가 빗줄기에 까맣게 지워졌다

한 밤에는 안방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고

그 열린 구멍으로 밤바다가 와서 문을 열면

어느새 북두칠성과 보름달이 내려와

새벽까지 바람 많은 안방을 지키다 간다

대문과 마당, 마당과 우물, 우물과 부엌, 그리고

장독대와 대밭이 있는 뒤뜰, 아직

그 무슨 소리가 살고 있어 빈집을 흔들고 있다

떠난 사람들 돌아올까, 저리도 풀들은

지붕까지 올라가 기다림을 먹고 있다

집집의 그늘을 가리려고 햇살은 내리지만

어둠의 부피가 커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

안개가 지붕을 덮는 날이면

가늘고 여린 잎사귀로 그늘을 넓히는 집

한낮인데도 빨간 열매는 쑥쑥 혼자 자란다

 

 

 

빈집을 허물다 /  임동윤


그 집에 슬그머니 들어가 본다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 기둥들이 삐걱거리다가 무너져 내린다

빗물 얼룩진 벽들은 검은 뼈를 드러내고

귀 닳은 바람이 떨어진 문풍지를 마지막으로 베고 있다

사방으로 열려있는 문패 없는 집

끝내 어디론가 떠나지 못해 굴뚝 언저리에 웅크린 텃새들

마른 삭정이 엮어 삐딱하게 굳은 진흙덩이로 벽을 발랐다

환삼덩굴 황망히 뒤엉킨 우물도 말라붙고

텃새 울음 자욱하던 느티나무도 장대 같은 빗줄기에 축축 늘어져 있다

사금파리 장독대도 무덤 하나 만드는 모두 돌아가 눕는 저녁

제 집을 완성하지 못한 텃새들 빗물 듣는 굴뚝 밑으로 가서 숨는다

이제, 함박나무 밑뿌리도 뼈를 드러내는

폭풍우의 날들이 한 사나흘 계속될 것이다

강원남도 울진군 서면 쌍전리 비바람 치는 그 집을 빠져 나온다

빗물 어룽진 흙벽은 한낱 추억일 뿐, 내 안에 집은 없다

눈감아도 보이는 것은 그림자 뿐, 내가 집들을 허물고 있다



◀ 계간 《문학 선》 2010년 봄호 ▶

 

 


겨울동행 / 임동윤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아도

어깨 시린 새들의 둥지 하나 보이네


마른 억새풀은 밤새 내린 눈으로 중심이 쓰러지면서

지상에는 작은 움막이 하나 지어졌네


모로 누운 풀 사이에 잠시 시선을 두거나

내 복잡한 몸을 저 바닥에 눕게 하는 일

눈 맑은 바람이 사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서로의 가슴을 서로 여는 일


이젠 바람조차 나를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네

성긴 햇살은 눈 덮인 억새밭에 눈이 찔리면서

벌써 강변 가득히 은빛 고기떼를 풀어 놓았네

눈 내린 겨울이면 내 안에서 파닥거렸네


서로 몸을 섞고 중얼거리며 가끔은 잊고 사는 일도 즐거웠네

저 눈 무게에 눌려 중심을 버리고

우리 아득히 몸 눕히는 일이야 조금 늦은들 어떠리


풀과 땅이 만나는 나지막한 공간, 그 경계에 선 새들이

마른 풀들 콕콕 쪼아본다, 바람이 달아난다

겨울이 몸을 풀면 나 이제 허리띠 조이지 않아도 되겠지


발밑에 수런거리는 새소리를 데리고 간다

일어서는 일이야 마지막 눈 뜨면 다시 수런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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