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 소사
p r a h a
메르세데스 소사 / 구광렬
1.
지구 반대편 구석에서 노래 한 줄로 깨달았습니다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건만 세상은
구석을 향해 닫혀있다는 걸
세상 힘든 것들 구석으로 몰리건만
묵묵히 구석은 그 어깨들을 받쳐준다는 걸
수평선에도 구석이 있고
그 면도날 같은 파도의 한 줄 구석에도
등짝을 곧게 펴는 고기들이 산다는 걸
갈대의 울부짖음을,
못에 박힌 빈 바가지의 달가닥거림을,
구석에서 태어난 바람은
입이 꽉 틀어 막힌 것들을 대신해 소릴 내 준다는 걸
그 바람 앞에선
작고 낮을수록 더 떳떳할 수 있다는 걸
2.
사람의 목구멍이
골짜기란 걸 알았습니다
물이 흐르고 새가 지저귀고
꽃이 피는
사람의 목소리가
바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물소리, 새소리, 꽃향기를
코, 귀에까지 실어다주는
사람들의 삶이
조각조각 퍼즐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한 조각만 빠트려도
문제를 풀 수 없는
아,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듯
사람의 목구멍에서
노래가 치솟음을 보았습니다
그 노래,
떨어져나간 퍼즐조각 같은
목숨들을 불러 모아
또 한 번 神의 얼굴로 풀어내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 아르헨티나 출신의 저항가수,
2009년 10월 5일 타계.
이런 아침엔 노래 한 자락 듣고 싶다. 그 노래가 아르헨티나 저항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라도 좋고 포르투갈의 저항노래 파두라도 좋다.
브람스라도, 모차르트라도 좋다. 좋은 노래는 우리에게 전율을 준다.
살이란 살 모두 오그라드는 듯한 전율, 그것이 또 노래와 소리가 시의 마당
한구석에서 연애하고 있음에랴.
구광렬 시인은 스페인어로 시를 써 멕시코에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노래 한 자락을 듣고 계신지, 불현듯 우리를 깨우는
소리 업고 있는 노래 한 자락을.
<강은교·시인>
2010.06.30 <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에서 출처 / 몽당연필님
Misa Criolla - Kyrie 키리에-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Ariel Ramirez (1921- ) Mercedes Sosa Ramirez Misa Criolla Kyrie Mercedes Sosa Mercedes Sosa (메르세데스 소사)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새로운 노래)은 본래 1950~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급속한 유입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숭고한 음악적 자산과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음악 운동이었다. 그 바탕에는 아르헨티나의 아따우알빠 유빵끼(Athaualpa Yupanqui),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를 필두로 한 전시대의 뮤지션들이 닦아놓은 '남미의 뿌리 찾기'의 전통이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화려한 치장을 제거한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단촐한 악기 편성이 주를 이루었으며, 가사에는 민중과 함께 하며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메세지를 담았다. 남미에 군부독재가 몰아친 1960년대~1970년대 초중반, 이들의 노래의 메시지는 더욱 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저돌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에 대해 군부는 금지곡 세례와 활동 제한, 강제 투옥과 출국 등의 초강수로 대응했다. 혼탁한 시대에 맞서 노래하는 사람의 책임을 다한 대가로 수많은 스타들이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며, 칠레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목숨까지 바쳤다. 이런 당시 남미의 정치적 상황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에,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그 사상이 여타의 남미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지는 것을 미국은 가만히 지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남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각 국의 보수 세력과 군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하여,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그들의 손 안에 묶어둘 수 있었다. 그토록 폭압적인 지배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종의 '목적음악'처럼 변질된 기분이 없지 않지만, 사실 누에바 깐시온은 어디까지 노래와 시의 만남을 추구하고 그 서정성과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남미의 음악 '혁명'이었다. 그들은 주옥같은 가사와 노래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켜내려 했으며, 노래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의 뚜꾸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노래 인생의 시작은 열다섯 살에 방송국의 아마추어 가요제에서 우승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프로뮤지션의 길을 걷지 않고 전통춤 강사로 살아갔지만, 1962년에 열린 가수와 시인들의 모임을 통해 누에바 깐시온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1965년에 코치킨 포크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며, 이것이 필립스사와의 첫 번째 음반 계약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는 작곡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곡보다 소사가 부른 노래가 더욱 유명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Gracias a la vida(생애 감사하며)'는 비올레따 빠라의 곡이고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는 유빵끼의 곡이지만, 오히려 소사의 목소리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토록, 그녀는 다른 이의 말과 음악을 완벽하게 자신의 말과 음악으로 변용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누에바 깐시온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의 명성을 쌓아간다. 1975년의 쿠데타로 아르헨티나?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녀 역시 극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1979년, 그녀는 자신의 콘서트 장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이 날 공연을 본 청중들과 밴드 멤버들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갖은 위협에 시달리고 험난한 인생길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남편마저 죽으면서, 더 이상의 음악 활동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군사정권에 의해 영구 추방되어 끝 모를 유럽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한없는 절망으로 시작된 망명 생활이었지만, 그것은 존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해리 밸라폰테(Harry Belafonte)등과 교류하고 공연을 벌임으로서, 그녀의 음악 지평을 넓히는 동시에 유럽 전역으로 그녀의 명성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아르헨티나에서 살면서 헌신해온 그녀에게, 타향살이는 정신적 스트레스 뿐 아니라 목소리가 닫히는 위기까지 가져왔다. 결국 그녀는 1982년, 많은 위험과 위협을 무릅쓰고 아르헨티나로 귀국을 감행한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잉글랜드에게 패배했고, 군부가 몰락하면서 너무나 허탈하게 민주화를 맞이란다. 곧이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많은 이들에게 기념비적인 공연으로 남아있다. 특히 'Gracias a la vida'의 마지막 1분을 장식하는 관객들의 기립박수로부터는, 단순히 귀국한 대가수에 대한 감사와 축하, 민주화에 대한 경탄을 넘어서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이름이 아르헨티나 인들에게 주는 위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소사의 레퍼토리들이 보다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 부터이다. 아르헨티나를 넘어서,스팅(Sting), 밀뜬 나시멘뚜(Milton Nascimento) 를 비롯한 타국의 슈퍼스타들에게 초대받아 기꺼이 공동 작업에 임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베스트 앨범과 모음집이 출시되어 그녀의 음악을 접하기는 더욱 수월해졌다.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1997년, 그녀는 한 번 더 쓰러진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르헨티나의 평화와 환희, 그리고 노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몸에, 예순을 넘어 반응이 찾아온 것이다.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사이에 탈수현상으로 30kg이 빠지면서,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걸 이겨내고, 1998년 < Al Despertar >로 재기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만약 메르세데스 소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듣고 바로 '아, 좋구나' 느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그녀의 두터운 흉성과 특별히 오버하지 않는 무난한보컬 스타일은 자칫 무미건조하게 들릴수도 있다. 또한 노래에서 뿜어 나오는 육중한 무게감과 지나칠 정도의 차분함으로 인해 절대 쉽게 가슴을 파고들지 않을 것이며, 특히나 요즘의 감성과는 절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미쳐 걸러지지 않은 잔해 같은 앙금들이 은연중에 베어 나온다. 그녀의 음악이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에 의한 압박감 탓이 클 것이다. 직선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소위 '한방에 보내는 음악'에 익숙하고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나칠만치 관조적이며 사색적인 소사의 노래는 그리 매력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소사의 노래는 가슴속 분노와 격정을 있는 그대로의 이상으로 분출하는 절창도 아니며, 기교와 기술이 넘쳐흐르는 솜씨 좋은 가수의 요령과 센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엔 그런 연출된 감정이나 훈련된 기술 따위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담담한 고백과 진실성이 들어있다. 이제 그녀의 나이도 일흔을 넘겼다. 아르헨티나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민중의 곁에서 몸소 함께 하며, 진실한 영혼이 담긴 노래로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그녀의 목소리는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해와 성찰을 품고 있다.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해석자'라는 영광스런 호칭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그녀가 과대평가 받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릇된 집권 세력에 적극적으로 저항을 표한 가수도 아니었으며, 민중을 위해 노래한 가수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같은 호칭은 과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소사 자신도 인정했다..그녀는 절대 사회참여적인 노래를 한적이 없다고, 처음부터 그녀의 관심은 그녀주위의 삶과 현실, 그리고 인간의 문제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견지하지는 않았을망정, 경제난과 군부정치에 이중으로 시달리던 아르헨티나 평민들의 괴로운 삶에,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한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런 그녀의 위상은 아무리 높게 평가되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전 시대 아르헨티나인들이 추앙한 인물이 '국모' 에비타였다면,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던 공통 분모는 메르세데스 소사였다. 'Gracias a la vida'.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많은 사람들, 기쁘고 슬픈 일들, 소중한 사랑들,자신이 겪고 만났던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고, 산다는 것 자체로 기껍고 행복하다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그녀는담담하게 노래한다. 비올레타 빠라의 원곡을 넘어서는건 물론이거니와,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노래로 자신있게 추천하는 곡이다. 요즘 가수들에 질렸다고 말하며, 진정한 가수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첫 손가락으로 꼽고 싶은 가수이다. 본질적으로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사실 그녀의 별 것 없어 보이는 매끄러운 인토네이션과 비브라토, 바이브레이션과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음정의 구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어느 정도의 연륜과 감상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모국 아르헨티나와 함께 했고, 그 고통에 아파하고 환희의 순간을 함께 했으며, 치욕으로 얼룩진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마지막 빛 같은 존재였던, 영원한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 메르세데스 소사. 설령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삶에 무한한 영광이 함께 하리라. 라틴 아메리카는 영원히 그녀를 추앙할 것이며, 전 세계인이 그녀의 노래에 담긴 치유와 회복, 기쁨과 사랑의 힘을 축복할 것이다. -퍼옴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는 특유의 굵고 온화한 목소리로 누에바 깐시온을 상징하는 대가수이다. 물론, 그녀는 빼어난 노래 실력과 여타의 가수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자세'를 가진 여걸이지만, 그녀가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로까지 칭송되는 것은 그녀의 음악 인생이 모국인 아르헨티나와 남미의 질곡 많은 현대사와 괘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