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경치 外 / 심재휘
바람의 경치 外 / 심재휘
바람의 경치 / 심재휘
-낯선 마을의 달
겨울과 봄의 사이 또는 낮과 밤의 사이에서
생각하면 나는 어느 쪽에 서 있었던가
낯선 마을의 초입에서 어느덧 달이 뜬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젊은 사람들은 마을 공터에 모여
알 수 없는 저수지의 깊이에 관해서
차고 기우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돌리는 깡통 속의 불은
제 목숨으로 속없이 둥글게 빛난다
허나 제자리에서 오래 돌수록 밟음도 지치는 것
그러면 타다 만 불씨들을 발로 비벼 끄듯
엉덩이에 붙은 검불을 털어내듯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 것이다
마침내는 어둠에 빚지게 될 터이다
그랬던 것이다 저 낯선 마을의 달이
어둠에 깃들어 사는 것처럼
나는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을 하나가 불현듯 내게로 다가와
나를 슬쩍 슬쩍 지나갔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이다
쓸쓸한 향기 / 심재휘
봄날 그 꽃향기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꽃은 시들도록 열심히 피었을 뿐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바람 속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러 꽃들이 연달아 피고 졌던 것처럼
내 몸을 제 香으로 스미고 흩어진 사람들
어디에선가 머리 위로 눈물 같은
구름을 피워 올리겠지만 그때
아무 냄새도 없는 구름들은 슬픈 짐승처럼
내게로 걸어와서 또 걸어나가겠지만
내 몸에 쌓인 그대들의 나는
오늘 나는 한없이 쓸쓸한 향기입니다
바람의 경치 / 심재휘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와 또 어느 봄날
느티나무 저 높은 가지 끝에도 물이 오를까
싶은 지방도로 끝난 곳에서 우리는 무슨 잎을
피우나 이제 그대에게 어떤 편지를 쓰나
그리운 당신 더 쓸 말은 없구려 이만
생각하면 언제나 누군가 옆에 있었건만
바다로 이어진 제방에 나는 늘
혼자 앉아 있었던 거였다
산기슭에서 연을 날리던 아이들은 바람 부는
들판을 쏘다니다가 어느 뻘밭에서 늙어갔는지
포구의 폐선들 잔물결에도 일렁거린다 때때로
바람은 숲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노려보다가도
낄낄대며 나와 새들을 높이 날리곤 하였는데
새들이 바람을 몸에 품으며 바람의 영토에서
훨훨 벗어나는 걸 바람은 몰랐던 거다
몰랐으므로 또한
새가 되지 못하는
나는
당도하지 않은 그대의 소식처럼 떠돈다
그러나 떠도는 것은 그대와 나의 운명
여관에서 밤새 썼던 나의 편지들이
우체국 어두운 사서함 속에서 낡아가듯
그대 역시 마을의 거리에서 혼자 늙어갈 테지
온몸에 바람의 문신을 새기며 쓸쓸할 테지
하지만 그대여 나는 내 얼굴을 스쳐 천천히
지나가는 이 잔혹한 기운 속에다 이렇게 쓰려 한다
그대와 함께 했던 날들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안개, 여관, 물소리 / 심재휘
수몰된 것들의 마음이 밤새
자욱하게 내려앉아 내가 든
안동역전 여관방에는 어디로 가는지
첫 기차 소리가 축축하였는데
미명 속으로 멀어지는 누군가의
젖은 발소리도 용서하고 싶었는데
창가에 놓아둔 선인장의 적의에 놀라
세수를 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다시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면 저 기차
안동이 종착지일지도 모르겠다고
이 방 어딘가에 숨어 이따금
커튼을 흔드는 바람
그런데 바람도 뚫을 수 있을까
여관방에 안개처럼 기어든 새벽의 소리들은
모두 젖어 한 방울씩 떨어져 보는데
낡은 수도꼭지의 쉽게 잠기지 않는 생은
그러나 때가 낀 세면대에 잠시 머물다가
온수든 냉수든 길고 어두운 하수도관을
따라가면 그뿐 그러면 좁고 더러운 여관방에는
내 몸 사라지고 오래도록 물소리만 가득 남을 뿐
그늘 / 심재휘
그늘이 짙다
8월 해변에 파라솔을 펴면
정오의 그늘만큼 깊은 우물 하나
속없이 내게로 와 나는
그 마음에 곁방살이하듯
바닷가의 검은빛 안에 든다
한나절 높게 울렁거리던 파도가
슬픈 노래의 후렴처럼 잦아드는 때
더운 볕도 기울고 그늘막도 기울어
조금씩 길어지던 그늘은
어느덧 바닷물에 가 닿는다
물빛을 닮은 그늘은 넉넉하다
우물 안의 맑은 샘물처럼
그늘은 이제 바다에서 흘러나온다
바다 속의 넓은 고독으로부터
슬며시 빠져나온 손 하나가
내 발을 덮고 가슴을 덮는다 곧 있으면
제 빛의 영토로 돌아갈 찬 손 하나가
그러나 그늘은 큰 그늘 속으로 돌아갈 뿐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나
다만 내가 못 볼 뿐이니
밝았다 저무는 것은 내 안의 빛이었으니
넓은 넓은 바닷가에
내가 덮고 있는 그늘 하나
해질녘의 그늘 같은, 늘 그리운 사람
퇴색한 풍경 / 심재휘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설 때
이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그 느티나무 근처로
늦가을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나무는 퇴색한 풍경 하나를 거느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녁이 와도
나는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을 퇴색의 입구를 찾다가
그만 갑자기 늙어버렸다
한철 살다간 매미 울음만도 못하였다
라디오를 닮는다 / 심 재 휘
맑은 날이면 창밖의 과실나무는
바람에 몸을 내걸 줄 안다
더는 열매를 길러낼 수 없어도
제 상처를 핥으며
오래 아파할 줄 아는 나무
그러나 나는
저 병든 나무로부터
매일 조금씩 옮겨와
라디오의 어느 거친 주파수에 서 있다
녹슨 왕관을 뒤집어쓴 채
서서히 방전되는 라디오
몸이 아프다는 것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잃어버린 몇 개의 나사와
부러진 안테나를 생각한다는 것
더불어 나의 기억은 늘 수리 중이므로
어느 날 당신을 몰라볼지 모르겠다
당신께 미리 용서를 구한다
허물어진 집 / 심재휘
태백에서 사북쪽으로 재를 하나 넘으면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겠다
돌의 어둠을 기다랗게 파고 들어가
다시는 돌아나오지 않겠다는 눈물이었겠다
그러나 이제는 막장 같은 삶도 사라지고
그 말도 사라지고
폐광들 근처 산비탈에는 허물처럼
빈 집들만 남아 허물어지고 있다
그 옛날
몇 개의 재를 넘어 이곳까지 밀려와
기울어진 땅에 기울어지지 않게 세운 집
최후의 후회인 듯
최후의 결심인 듯 서 있던 집
생각하면 나에게도 그런 집 하나 있었으리라
검은 낯 씻으며 또 살아졌던 하루가
허리 숙여 들던 그런 집 누구에게나 있었으리라
오지 같은 마음에 세워졌던 집 하나가
북쪽 벽에 못을 박고 / 심재휘
나의 방 북쪽 벽은 계단 같기도 하고
어두운 골목 같기도 한데
실은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문이다
이따금 아무 책이나 골라 읽기도 하는데
책마다 문법들이 서로 달라 망연히 표지를 덮으면
어느새 저녁이 와 있을 때가 많았다
뭐랄까 책은 그저 신발 같은 것이어서
가슴 높이의 못에 바람의 경치를 걸고
한나절 바라보는 의자의 날이 늘었다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생기고 새들이 난다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바람의 방향이었다
하여 잠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구름이
애처로워지는 가을이었나 보다
놀이터의 벚나무가 한 떼의 나뭇잎을 쏟는다
가지에 매달려 오래 바람에 시달렸던 나뭇잎들은
바람의 등을 자유롭게 미끄러지며 내려온다
미끄럼을 내려온 아이는 그네를 타러 뛰어가고
세상으로 날아오르는 하학길 여고생들
여름새처럼 지저귄다 그 곁을 천천히 걸어
지상에 당도하던 나뭇잎 하나가
빙그르르 몸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나는 다시 북쪽 벽에 못을 하나 박고
새들과 나누었던 생전의 이별들을 건다
부드러웠지만 만질 수가 없는 것들
달빛만이 가끔 어루만지며 지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