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 2010. 6. 27. 19:53

 

 

 

 

 

아슬한 말  / 김명기

 

 

 

 

아슬한 말 / 김명기

 

 

눈물을 머금는다는 말처럼 아슬한 말 있을까

 

늦은 술자리 끝

술방 문 열고 나서는대

아랫배 축 늘어트린 하현달 아래

꽃 지고 잎 다 져

맨살만 하얗게 비치는 배롱나무 한 그루

 

그 가지 끝

지난 생을 마저 털어내지 못한 미련으로

터질 듯 터질 듯 차마 터트릴 수 없는

말간 눈물들 달려 있네

 

슬픔이 영글면 언젠간 터질 텐데

 

오롯이 작은 꽃잎에 매달려

짧게 지나간 사랑했던 날들

길게도 배웅하고 돌아서서

저토록 모질게 참는 몸이라니

 

머금은 몸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

그의 생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도 하는데

꽃피던 그 즈음이었던가

 

내 눈 끝마저 시려와

 

잠시 한눈파는 사이

상강霜降의 밤을 막 지나온 바람

그 가지 끝에 걸려 넘어지네

 

마침내

툭,

터져버리네

저 눈물들

 

 

 

 

 

 

쑥갓꽃 / 김명기

 

 

해 걸음 느린 저녁

누군가 화단처럼 만든 텃밭에 노란 꽃 피었다

눈 익은 푸성귀에 저렇게 예쁜 꽃이라니

꽃피우기 전 다 잘라먹어

언제 저것의 꽃을 본 적 있어야지

텃밭 주인 맘이 좋거나

혹은 게으르거나 어쨌든 다행이다 싶어

밭가를 맴도는데

붉게 퍼져가는 저녁 안으로

느실느실 돌아오는 사람들

흔한 저 푸성귀 닮았다, 텃밭 같은 세상

제가 꽃인 줄도 모르고 피어 잘라 먹히는 사람들

근근한 생을 기워주는 일터가 날마다 잘라먹고

그 생의 7할은 자식이 잘라먹고

잘라먹은 자식은 망할 놈의 사교육이 다시 잘라먹고

나는 당신들을 당신들은 나를 잘라먹고

그런 우리 생의 대부분은 협소증을 동반한

기관지 천식 같은 자본들이 씨렁씨렁 잘라먹고

그래서 여때 푸른 대궁인 사람들 돌아오는

어스름한 저녁 길, 어떻게 살아남아 꽃피웠냐고

바람을 쥐고 싸락싸락 흔들어대는 꽃들에게

오래오래 견디는 법을 물어본다

 

 

 

 

 

 

 

와카나이항, 11월과 12월 사이 / 김명기

 

 

오호츠크를 향해 끝없이 밀려가는 먹장구름은

그곳의 오랜 관습이다.

잠시 머문 잿빛 하늘로부터

그들의 발자국 같은 젖은 눈 내리면

두꺼운 철갑 위를 멍울져 번지던 붉은 메꽃들

꽃들에게 침식당한 늙은 게잡이 배들은

오라에 묶여 요동 없는 날이 깊어진다. 그런 날,

사람들은 뱃속에 산 채로 버려져

항구엔 가끔 싸구려 보드카나

달러를 팔러 오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며칠씩 눈이 내리는 동안

굶주린 까마귀들과 좁은 배를 뛰쳐나온

짖지 못하는 러시아 개들이 사람보다 많았다

그것은 고요한 슬픔 같은 것이어서

낮도 밤같이 어둡고 적막하기만 했다.

도무지 세련이나 정리 같은 것들이 연대하지 못해

낡은  흥건함이 차라리 평안했던 곳, 그곳은

내면에서 이면으로 밀려난

떠도는 것들의 은신처이기도 했으므로

내장 속을 흐르는 피마저 차갑게 응고되어야

외로움이나 그리움 따위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땐가 녹슨 뱃속에서 구역질처럼 튀어 나온 사내가

그의 내장을 덥혀주던 싸구려 보드카를

바다 위로 다 토해내고 기어이 그 자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므로 내린 눈들이 점점 부풀어 올라 솜이불 같던 저물녘

나는 그속에 누워 내가 건너온 바다와

바다 위에 찍힌 숱한 발자국을 더듬다

어느 순간,

말없이 남겨 두고 온 것들이 와르르 밀려들 때면

비스듬히 바다 쪽을 향해 몸을 기울여

심하게 출렁거리기도 했다.

결국 남겨진 것은 나였으므로.

 

참으로 지리멸렬한 겨울이었다.

 

 

 

 

 

 

 

동백꽃 피고 지는 사이 / 김명기

 

 

숱하게 지나간 시간 속

무수한 각오들은

저 붉은 꽃의 한 호흡 같은 것이라

다만 그 순간만 지독했을 뿐이네

그까짓 혁명성을 버리고

이까짓 시를 택하고서야

비로소 터져 나오던 눈물처럼

채 여물지 않은 봄날

창부타령 같은 옅은 비 한 자락 사이

꽃 떨어지는 소리

 

 

 

 

 

 

부러진 사다리가 있는 저녁 / 김명기

 

 

한쪽 다리 부러진 채 담벼락에 기댄 늙은 사다리 하나 있다

 

부러진다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는 것

차라리 노역이 아름다웠을 저 몸

부러진 채 얼마나 오랜 불구의 시간을 또 견뎠을까

쉼 없이 시공을 내딛는 것들은

언젠가 한번은 부러질 날을 향해 가는 것

그것들의 이면도 차마 저렇게 아름다울까

부러진 채 어딘가에 기대

오래도록 불구의 시간을 건널 수 있을까

낡은 이불처럼 숨죽은 저녁

한 무리 멧새들 그 노구 위에 가볍게 앉아

부러진다는 것은 쓸모의 다함이라 지절대다

진 빠진 옹이빛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독촉하듯 내리는 어둠의 언저리

볼품없는 제라륨 몇 송이만 더욱 붉다

 

 

 

 

 

심포리역 / 김명기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가보기에 좋은 곳이리
세상에 아주 없는 주소지처럼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첫차도 막차도 없으니
애달프게 기다릴 마음조차 없는 곳
도계나 통리쯤에서 기차를 타고
멈출 듯 지나치다보면
지금쯤 붉은 개옻나무 옆
잎 진 벚나무나 개나리 더없이 쓸쓸할 그 곳
아직도 곡진하다는 말 마음속에 품었다면
완곡한 철로변에 우두커니 서서
어둠처럼 밀려가는 컴컴한 침목 사이
차곡차곡 내려앉은 녹슨 자갈들이
서로 모서리를 맞대고 갈라진 틈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내는지 헤아려보아도 좋을 일
그래도 떠나보낸 당신 마음이
도저히 내려설 수 없는 곳이거든
아예 오지 않은 듯 돌아서도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으리 어차피
아주 없는 주소지처럼 세상에 서 있을 그 곳

 

 

 

 

 

 

안묵호* / 김명기

 

 

 

비 내리는 날

안묵호 바닷가에 속절없이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마당 삼은 산동네를 올려다보면

벼랑 끝 풍경처럼 매달린 집들

그곳에서 흔들리며 내려다보는 바다는

또 얼마나 아슬할까 싶습니다

이런 날 바다는 유효기간 알 수 없는

음울한 비린내를 끌고나와

지린 눈물을 흘리며 길바닥을 헤집기도 합니다

한때 어느 집 가계를 빛나게 했던 어구들이

오랜 실직에 지쳐 쓰러진 길가에도 비는 내리고

대낮부터 작은 가게에 모여 앉은 몇 사람

그때 떠났어야 했다고

서로를 지탱할 수 없는 사족 같은 말끝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얼굴로 알 길 없는 속으로

툭 털어 넣는 말간 소주잔 안에도 비는 내립니다

누구라도 해진 절망 하나쯤 가져 나와

젖은 빨랫줄에 널어놓아야 할 것 같은 안묵호

사브작 사브작 비 내리는 날

그곳에 가면 너나없이

마당 같은 바다를 향해 비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물색없이 젖어갑니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의 바닷가 쪽 마을.

 

 

 

 

 

바람에 관한 묵상黙想 / 김명기

 



바람을

바람이라 부르지 않았다면, 가령

손바닥 분다고 말해도

지금 같은 느낌이었을까

오래 알고 지냈으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니, 가끔 길에서 마주친 적 있어도

알아보지 못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를 그는

소문에 흙을 밟지 않고

허공으로 난 길만을 다닌다는데

그러다 어느 이가

누군가를 죽도를 그리워하면

그이 주변을 맴돌다 어깨나 가슴을

툭툭 건들기도 한다는데

만나지 못해도 문득 느껴진다는 것은

길을 걷다

어깨나 가슴이 선득해질 때

그때, 내가

당신을 무장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호石湖* / 김명기

 

 

세월이 간다는 것은 사람도 따라가는 것이다

외로움도 오래 묵으면 양분이 될 수 있다는 걸

외조부모 벌써 떠나버린 빈집에 와서

수북하게 무릎 위로 자라난 쑥대를 보며 깨닫는다

견디다 견디다 외로움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집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젖은 냄새도 바뀌는 것이다

군불의 온기와 함께 빠져나간

밥 냄새와 찌개 잣는 냄새

토막 난 굴뚝 아래

씁쓸한 궁기의 냄새를 따라온

비루먹은 고양이들 눈빛만 처연하다

마음이 찡하지만 다만 이 순간일 뿐

누군가 떠나버린 마음속 빈자리를

아주 빠른 속도로

다른 것들이 점령해버리는 사람처럼

냄새 바뀐 빈자리는

이내 다른 생이 들어와 살아가는 것이다

남편을 앞세우고 홀로 남겨졌던

그녀의 빈속을 채우느라 계속 텅 비우고

마침에 쓰러진 됫병 뒹구는 마당 한켠

문짝 벌어진 통시 속 움츠린 햇살마저도

푸석하게 낡아버린 오후

그래도 때가 되면 저 혼자 피었다 지는

백일홍 나무가 서러워 다가서는 발걸음을

한사코 잡아채는 환삼덩굴이여

긴장한 고양이들 낮은 울음소리여

살아 움직이는 낯선 부재의 모든 슬픔들이여

 

 

 

*경북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 바닷가 마을 이름.

 

 

 

 

 

 

오릭스호號에서의 일주일 / 김명기

 

 

   그해 겨울 러시아 선적 대게잡이 배에 조업감독관이 된 나는 수평선 보이지 않는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가끔 사할린 반도 어디쯤인가 가물대던 12월 오호츠크, 일상이 가볍게 들려주던 공포란 정말 실없는 말들이었다. 일주일을 설탕물만 마셨는데 설탕물도 쓴맛이 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 이틀 죽을 것 같았고 그 공포가 사그라질 즈음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밤이면 바다 속 유령들이 선체를 뜯어먹던 소리 그 소리에 놀란 몸뚱인 관 짝 같은 침상 위를 떠올랐다 곤두박질치고 그럴 때면 지금은 이름도 가물한 늙은 러시아 선원이 다가와 쪼그라든 내 귀를 비벼주며 알지 못할 슬라브어를 불어넣곤 했는데 그 낯선 언어들이 나를 토닥여 잠재우면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곤 했다.

 

  나의 병증은 누군가에겐 곤란한 일이어서 배를 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가난에 몰려 편주片舟에 육신을 맡긴 그들에게 실익없는 회항回航이란 그만큼 가난의 길이가 늘어나므로 나는 그들이 먼 고향에 가난과 함께 두고 온 아내나 자식들에게 곤란한 짐이 되어 있었다. 회항에 불안은 간혹 통발 속 청어를 꿰던 사내의 짜증이 되기도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선장의 굵은 주름살이 되기도 했으나 누구 하나 내게 불만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나는 차라리 배 밑창에 침잠한 등껍질 붉은 그들의 재화財貨였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훗카이도 최북단 와카나이로 뱃머리가 돌려진 밤, 지독한 두려움이 파먹은 눈알은 흐려지고 브리지 밖으로 바다 속 유령들을 키울 자양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을 양보한 사람들은 조용히 보드카를 마시거나 멋대로 더빙된 외화 속에 빠져 애써 나의 미안함가 마주치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서서히 멀어지는 간헐적 죽음의 공포로부터 펀안한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등 뒤로 선장의 서툰 영어가 희미하게 들렸다. "돈 워리 미스터 킴" 누군가 나를 깨웠을 때 사방이 하얀 와카나이 선창에 배가 묶이고 있었다.

  짧지 않은 일주일이었다.

 

  때로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부풀어 황망한 날. 사람만이 희망이었던 그때를 기억한다. 하선의 순간까지 가슴을 맞대어 주던 북구의 이방인들, 비린내 나는 그들의 식은 입김과 어깨를 구부리며 축축한 눈을 맞춰주던 이름 모를 얼굴들을 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오호츠크 겨울 밤바다 위 시린 별이 더욱 서러울 때면 럭키스트라이크를 입에 물고 밤새 통발을 건져 올리던 사람다운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음을.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 김명기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날,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場판 한 귀퉁이,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랜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얼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댔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므로……,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지막이 말해주었다.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시집『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 전당

 

남택상 / Twilight At the river side  클로드 최 / Blue Autumn 외 여러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