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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1716

시클라멘 / 강일규 시클라멘 ​ 강일규 ​ ​ ​ 베란다에서 시클라멘을 키우는 것은 겨울 햇살로 꽃의 무늬를 수놓는 일이라 했다 ​ 시클라멘은 햇살의 온기로 꽃 하나가 피고 지면 또 다른 꽃대가 올라온다 했다 꽃이 피지 않으면 여름이라 했다 ​ 나는 물로 키우고 당신은 입김으로 키우고 ​ 물을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요! 라는 핀잔에 가끔은 물을 빼버리기도 했다 ​ 들어올 땐 싱그럽고 빠질 땐 뜨끈한 바람이 문틈을 들랑거렸다 그 바람이 꽃을 피운다 했다 그녀처럼 ​ 화분에 젖꼭지만 한 붉은 꽃망울이 맺혔다 ​ 한겨울에 이토록 화사한 꽃을 피웠으니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향기를 맡으며 ​ 고개를 빳빳이 세운 저 시클라멘도 꽃이 필 때는 아플 거라 했다 —계간 《문예바다》 2022년 12월 21일 --.. 2023. 1. 8.
양관(陽關) / 조 정 양관(陽關) 조 정 지구에게 말 걸기 좋은 자리였다 세미하게 늘어뜨린 당사(唐絲) 아지랑이로 사막이 넘실거렸다 감각의 채무자인 경련과 질식 쪽으로 시간이 꼬리를 물고 나아갔다 모래 밖으로 뜨거운 혀가 나와 발을 핥아주었다 걷다 멈추면 무너지는 절이 저 끝에 있나요? 코발트빛 도편은 날아가 어제 태어난 별의 정오가 되나요? 누가 저리 설레요? 천산의 눈 녹아 흐르는 강이 시간 너머에서 숲을 일으키나요? 탑 쌓을 돌멩이 하나 없는데 마음을 어디에 얹어요? 죽음을 동무 삼아 떠난 이들은 구름 전대를 차고 갔다 샘물이 솟고 어린아이들 달리는 풍경이 오래 발효하는 길이었다 머뭇거리는 자취도 풀을 맺는 기약도 낙타 오줌 냄새도 남기지 않았다 지구가 가엾게 들어 올린 정자 난간에 기대어 미라 한 채 질(膣)을 타고 .. 2023. 1. 8.
따뜻한 진창의 기억 외 2편 / 김용옥 따뜻한 진창의 기억 (외 2편) 김용옥 추석 앞둔 미술관 열한 시 소녀가 혼자 그림 앞에 서 있다 진창을 건너본 적 없는 가는 흰 손목 그때에도 미술관이 있었더라면 온몸에 청보라 물감을 묻히고 어둑한 실기실을 밀고 나가 열리지 않던 시간의 문고리를 열었더라면 오수 넘치는 뒷골목을 싸돌아다니느라 비루해진 몸 참을 수 없는 악취에 길들여진 따뜻한 진창의 기억 더는 되돌아설 수 없는 나락 너머의 흰 발목 거친 광목천을 가득 채운 차콜로 채색한 선 위에서 아직도 위태로운 서녘이 기울고 있다 물왕은 없다 —김기라, 「플로칭 빌리지」 황톳길 타박타박 걸어가 머물렀던 물왕리 삼십 년 건너뛴 다저녁에 지나간다 발아래 골짜기에 고인 불빛 춥고 빛나던 청춘의 물왕은 없다 버짐 핀 눈꽃 내리는 차창을 닦아내도 자꾸 쌓이는 .. 2023. 1. 8.
애월 / 서안나 애월 서안나 나는 밤을 이해한다 애월이라 부르면 밤에 갇힌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백사장에 얼굴을 그리면 물로 쓰는 전언은 천 개의 밤을 끌고 온다 귀에서 꽃이 쏟아진다 내 늑골에 사는 머리 검은 짐승을 버렸다 시집에 끼워둔 애월은 눈이 검다 수평선에서 밤까지 밑줄을 그어본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검정은 어디쯤에서 상심을 찢고 태어나나 나는 오늘부터 저녁이다 ⸻계간 《불교문예》 2021년 봄호 ---------------- 서안나 / 1965년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1990년 《문학과 비평》에 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2022. 12. 21.
애월 2 외 1편 / 서안나 애월 2 서안나 나는 밤을 이해한다 애월이라 부르면 밤에 갇힌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백사장에 얼굴을 그리면 물로 쓰는 전언은 천 개의 밤을 끌고 온다 귀에서 꽃이 쏟아진다 내 늑골에 사는 머리 검은 짐승을 버렸다 시집에 끼워둔 애월은 눈이 검다 수평선에서 밤까지 밑줄을 그어본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검정은 어디쯤에서 상심을 찢고 태어나나 나는 오늘부터 저녁이다 재의 풍경 서안나 뒤돌아서 사진을 태워야 망자가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얼굴이 흐려질 동안 두 눈에 담았던 풍경이 재가 될 동안 나는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등으로 봄 햇살을 할퀴며 표범처럼 울었다 입술에 감추었던 약속과 고백과 지상의 영광과 모욕과 수치가 한 뭉치의 지전.. 2022. 12. 21.
금몽암 / 조용미 금몽암 조용미 이곳의 들숨과 날숨, 이곳의 밀물과 썰물, 이곳의 마음과 마음, 이곳의 한기와 온기 사이 또 어디에 내가 자주 머물렀더라 어떤 때 네가 어느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지는지 알아차리는 첨예하고도 심심한 그 일이 좋았다 금몽암에 들어 파초 잎에 시를 쓴다 잠을 잘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다면 이 별은 전생이 분명하니 그만 건너뛰기로 한다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욕망과 아름다움이 잠복해 있다 우리를 다치게 한다 금몽암에 들러 알록달록한 달리아를 꺾어 다음 생을 준비한다 다친 자국마다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처럼 하얗게 꽃이 파고들었다 달리아는 혼처럼 나를 대한다 —계간 《청색종이》 2022년 봄호 --------------------- 조용미 /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2022. 12. 21.
초록의 어두운 부분 / 조용미 초록의 어두운 부분 조용미 ​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 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많은 초록의 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 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 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 우리는 거기 앉았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 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 ​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 노랑에서 검정까지 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 2022. 12. 21.
야구공으로 사는 법 / 이병철 야구공으로 사는 법 이병철 야구공에는 제멋대로 날아가는 새떼가 있다 새들을 길들여 아름다운 궤적 하나 만드는 것이 야구공으로 사는 법이다 야구공엔 은은한 미소와 입술 처진 우울이 함께 있다 발자국들은 끊임없이 쫓고 쫓기며 활들은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당겨진다 한쪽을 닫지 못하는 괄호들과 영원히 닫혀 있는 괄호들 야구공은 언제나 열린 집이지만 폐쇄된 마을이자 풀 수 없는 수식이기도 하다 야구공은 0이고 이응이고 알파벳 o다 숫자와 문자의 시작이며 끝이다 생사가 엇갈리는 교차로와 혼이 드나드는 나들목을 지녔다 먹구렁이가 동자개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줄탁에 실패한 병아리 주검이 숨어 있다 산다는 건 방망이들을 부수거나 피해가는 일 직선 혹은 곡선으로 세월을 그려가는 일이다 솟구치거나 곤두박질치면서 높이 떴다가.. 2022. 12. 21.
외딴 집 / 이승희 외딴집 이승희 여름은 찬란했고 비로소 폐허가 되었다 이제 어디론가 가지 않아도 된다 진화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다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두 팔이 어디까지 사라지는지 보려고 사라지는 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려고 여름이 외롭고 슬픈 얼굴로 자꾸 돌아보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이 자꾸 무언가 되는 걸 보고 있었다 구름 같기도 한 나를 낳은 것들 같기도 한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쓸쓸하다는 말 그런 말은 미래가 될 수 없었다 무언가가 시작된다면 여기서부터여야 했다 화분을 들이고 온종일 화분에 심어져 있거나 화단에 물고기를 풀어주고 온종일 물고기를 따라다녔다 밤이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새로운 것은 없지만 새롭지 않은 것도 없어서 여기와 저기가 국경을 걸어서 지나던 밤처럼 어루만질 수밖에 없게 .. 2022. 12. 17.
날개를 생각하는 물고기 / 임희숙 날개를 생각하는 물고기 임희숙 여기는 너무 좁아요 분청철화 물고기무늬 병 아가미가 자라 스카프처럼 목을 조여요 두통 때문에 수초를 씹고 있을 뿐 머리가 무거워요 배는 홀쭉해 보여도 알이 가득 찼어요 날아올라야 하는데 무거워요 날개가 젖었어요 당신은 지느러미라고 지느러미는 젖는 법이라고 속삭이지만 그것도 당신이 말할 권리 끝끝내 고집을 부리신다면 백토 바른 항아리 맨살이 드러나도록 분청사기의 모가지를 분질러야죠 그리고 날아올라야죠 날개가 야자수처럼 커요 입술 속 이빨은 너무 많구요 뱃속에는 오백 년을 기다린 새끼들이 있어요 강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저를 흙 속에 가두지 마세요 이제 정말 날개만 생각하려구요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11-12월호 --------------------- 임희.. 2022.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