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 / 장철문
호두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 장철문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하늘에 막 생겨나는 달이 있었다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마음에 막 생겨나는 사람이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 막 돋아난 달처럼 막 피어난 호두나무 푸른 잎사귀 사이로, 돋아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라고, 그 사람이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데 또 놀랐다 어스름 바람에 팔랑이는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로, 그 사람도 달을 보고 내가, 그 사람에게 생겨나는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람의 씽긋 웃는 얼굴이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하늘에 떠 있었다 어두워지는 호두나무 잎사귀 아래서 그 사람을 보고, 다시 보고 호두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이 살을 감고, 달이 싱거워지고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호랑지빠귀 소리에 귀가 기울고, 하늘에 떠 있는 그 사람..
2024. 9. 6.
킬리만자로에 가기 위하여 / 송재학
킬리만자로에 가기 위하여 송재학 유칼립투스 나무 그림자 백 미터 높이의 수피에는 오래된 상형문자가 빼곡하다 하지만 나는 비염 때문에 작은 화분을 들여놓고 낡고 오래된 책을 정리했다 피를 잉크로 사용했다는 서문, 광합성에 가까운 독후감, 꺾어버린 책등의 이름, 청춘을 자극했던 세로쓰기, 모래로 쌓은 둑 안에 해일처럼 가둔 마흔 살, 게으른 늙은 책, 글자가 너무 작아 낮달에 갇힌 문고본까지 언젠가 이 책들을 다시 읽겠다는 표정에는 초식동물의 긴 목이 있다 『시인학교』(김종삼 시집, 신현실사, 1977)와 『한국전후문제시집』(세계전후문학전집 8권, 신구문화사, 1961)을 함께 묶은 비닐 끈이 초현실주의에 매달린 것처럼 어디서나 우후루봉이 잘 보인다는 킬리만자로의 공허에 휩쓸려서 종일 책을 뒤적이다가 유리창..
2024.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