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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1758

번지는 것은 눈부시다 / 신채린 번지는 것은 눈부시다 신채린 구절초 하얗게 핀 묵정밭을 지난다 갈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꽃대들 풀섶으로 잔잔히 번져가는 흰 물결이 눈부시다 슬픔도 잔잔히 번져가는 것이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그에게로 그러나 기쁨도 그렇게 번져가는 것이다 사람아 네가 슬플 때 너만 슬픈 것이 아니.. 2009. 2. 21.
비비추 / 고영민 비비추 고영민 비비추라는 꽃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 번 본적 없는 그 꽃을 왠지 알고 있는 듯도 하네 그 꽃은 누구에게서 잠깐 빌려온 저녁 그 먼 곳의 가지빛 하늘과 꽃대 단지 이름만으로도 떠오르는 희디흰 얼굴 너머 약간 문드러진 목소리 그러다 결국엔 속속들이 너를 다 알아버릴 어느 .. 2009. 2. 21.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깻대를 베는 시간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 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 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2009. 2. 21.
민박 / 고영민 민박 고영민 바람도 없는데 시든 수숫대 허리가 소리도 없이 꺾어진다 점봉산 고갯마루 너머 하늘을 타고 황조롱이 한 마리가 높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마루 끝에 잠시 허리를 내렸다 민드름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로며 상강도 머지않았다 강기슭의 들국화 밭엔 기러기 울음이 종잇장처럼 나릴 .. 2009. 2. 21.
당신의 입속 / 고영민 당신의 입속 고영민 여섯살 된 딸이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렸다 밥 한 숟가락을 떠 씹지 말고 삼키라 했다 딸아이는 울며 입 속의 밥을 연신 우물거린다 씹지 말고 삼켜라 그냥 씹지 말고! 어릴 적 나도 호되게 생선가시 하나가 목에 걸린 적이 있다 밥이 삼켜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직접 밥 한 .. 2009. 2. 21.
꽃눈이 번져 / 고영민 꽃눈이 번져 고영민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 간다는 생각 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 2009. 2. 21.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 고영민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고영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앗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 2009. 2. 21.
앵두 / 고영민 앵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 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쐥,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 2009. 2. 21.
석류 먹는 밤 / 문정희 석류 먹는 밤 문정희 오도옥! 네 심장에 이빨을 박는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붉고 향기로운 피 나는 거울을 보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먹는 여자가 보고 싶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마녀처럼 두개골을 다 파먹는 여자 오, 내 사랑 알알이 언어를 파먹는다 한밤에 일어나 너를 먹는다 2009. 2. 21.
홀로 우는 방 / 문정희 홀로 우는 방 / 문정희 새로 이사와 집수리를 하며 부엌 옆 작은 방 하나를 홀로 우는 방으로 정했다 그 방에서 홀로 울 일로 나의 미래는 벌써 빛나는 시인 밤새워 달그락달그락 남몰래 비단 짜는 학이 되었다가 우렁 각시가 되었다가 새벽에 누군가 약력을 쓰라고 하면 나의 고향은 눈물 나의 모교는 .. 2009.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