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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달걀 / 고영

by 丹野 2024. 9. 13.

<TOPCLASS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2015년 05월호>


달걀
고영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창을 닫았다.
어둠을 뒤집어 쓴 채 생애라는 낯선 말을 되새김질하며 살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집은 조금씩 좁아졌다.

강해지기 위해 뭉쳐져야 했다.
물속에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있는 힘껏 외로움을 참아야 했다.
간혹 누군가 창을 두드릴 때마다 등이 가려웠지만.

방문(房門)을 연다고 다 방문(訪問)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로가 되지 못하는 머리가 아팠다.

똑바로 누워 다리를 뻗었다.
사방이 열려 있었으나 나갈 마음은 없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나는 아직 더 잠겨 있어야 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달걀은 알의 한 종류다. 알은 상징세계에서 영(零), 중심, 생명의 배자(胚子)를 가리킨다. 우주적 알은 하늘과 땅, 태양과 달을 품는다. 알이 쪼개지면서 하늘과 땅이 나오고, 태양과 달이 나온다. 알은 우주의 액화된 잠재력을 품는데, 이때 알은 모든 생명 되는 것들의 무수한 씨앗들이고, 그래서 ‘황금의 배아(胚芽)’라고도 불린다. 알은 딱딱한 껍데기 안에 생명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지만 살아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생명의 정수에는 아직 어떤 지각(知覺)도 없고, 따라서 어떤 자아도 없다. 그냥 생명의 원형, 생명의 핵(核)을 품은 물질일 뿐이다. 그것은 생명이되 아직 생명이 아닌 아득한 어둠이고, 그윽한 어둠이다. 본디 생명의 본질이 유현(幽玄)이고, 현명(玄冥)이다. 모든 생명은 어둠 속에서 빚어져서 빛 속으로 나아간다. 알은 원형질이 고요히 들어앉은 둥근 생명의 방, 생명의 소우주다. 고영의 〈달걀〉은 이 둥근 방에서 생명으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유폐된 자의 노래다.

알은 부화되기 위해 껍데기 안쪽에서 기다려야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빛이 넘치는 세계로 나온다. 새들은 공중으로 비상하며 솟구쳐 오르는 삶을 사는 존재, 하늘에 속하는 가벼운 공기의 요정이다. 새는 땅을 박차고 오르는 도약력과 공중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탄력성은 대지와 표면에 묶인 인간이나 가축에게는 하나의 기적이고 감탄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이로운 기예다. 새가 하늘로 솟구치며 날 때 새는 공중을 딛고 도약하며 춤추는 발레리나 같다. 이토록 가볍고 우아한 존재라니! 공중을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속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새는 자유다! 새는 빛으로 넘치는 공중을 맘껏 날며 그 빛과 자유를 누리고, 그 자유를 노래하는 존재다. 르나르(Jules Renard)는 봄의 전령인 종달새의 낭랑한 소리를 “저 위, 어디선가 황금빛 잔 안에 수정조각들을 짓찧고 있는 소리”(〈종달새〉)라고 표현한다.

고영이 노래하는 알은 아직 생명의 권능을 부여받지 못한 채 기다리는 자아의 표상이다. 보라, 알은 “스스로 창을 닫”고, “어둠을 뒤집어쓴 채”, 아직 어둠의 존재성을 “되새김질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 알[달걀]이 되고자 하는 것은 “착한 새”다. 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라앉은 것이 바닥을 딛고 솟구치며 떠오르는 것이다. 뱀과 지렁이들이 땅을 파고 제 몸을 숨길 때 새들은 대지를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새들이 힘찬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찰나 새는 대지의 무거운 중력을 떨쳐버린 한없이 가벼운 기쁨이자 웃음이다. 시인은 이 알[달걀]의 기다림을 “물속에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비유와 연관시킨다. 무엇인가 되기 위한 기다림과 유폐의 날들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힘껏 외로움을 참아야” 하는 것이고, “등이 가려웠지만” 참아야 하는 일이다.

그 고통은 이 시를 만드는 동사군(動詞群)에 의해 충분히 드러난다. 이 시의 문장들은 단 한 문장을 빼고는 모두 과거완료 시제형의 동사로 끝난다. 이를테면 닫았다, 살았다, 좁아졌다, 뭉쳐져야 했다, 참아야 했다, 아니었다, 아팠다, 뻗었다, 없었다, 있어야 했다… 등등이 그렇다. 이 과거완료 시제형 동사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기억들을 암시한다.

알은 아직 아무런 이름도 갖지 않는다. 누구도 이름을 붙여 불러주지 않았기에 그것은 익명성에 머물러 있다. 익명은 생명 이전이다. 그래서 호명(呼名)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대상에게 생명을 주고 개별적 존재성을 부여하며, 그를 태양이 높은 공중에서 황금비를 뿌리고 올빼미가 밤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 두 개를 켜는 이 세계, 즉 무-시간, 무-장소에서 ‘지속하는 현재’ 속으로 초대한다는 뜻이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줄 때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망각에서 기억에로, 비-존재에서 존재로, 내적 잠재력에서 외적 생명으로 달려나간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우리는 무한한 이름들이다. 엘뤼아르(Eluard)가 쓴 “한 얼굴은 정녕/세상의 모든 이름에 응답해야만 한다”(〈사랑, 시〉)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호명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름에 응답해야만 하는 얼굴, 즉 상호 연관성 속에서 의미를 갖고 빛나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미약한 날갯짓이라도 하며 날아오르기 위한 때는 아직 아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나는 아직 더 잠겨 있어야 했다.

알이 그토록 오래 어둠 속에서 절망에 복무하며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다 밝혀졌다. 다만 그 어둠 속에, 딱딱한 껍데기 속에 유령처럼 아무 존재감 없이 머무는 두 겹의 고통과 싸워야 한다. 아직 아무것도 아님, 즉 의미의 고갈과 존재의 공허가 그것이다. 고갈이나 공허는 다 같이 부재라는 점에서 하나다. 바로 “착한 새”, 즉 착함과 새라는 두 가지의 부재다. 고갈이나 공허를 채워야 할 것은 바로 착함이고, 새라는 새로운 존재의 양태다. 이 시의 서정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착한 새”는 더 높고 명랑한 생명 양태의 삶에 대한 은유다. 알에서 무엇인가 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이 아주 헛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사이 “나와 당신 사이에도/꽃이 피고 별똥별 지던 밤들이 있었”고, “함부로 읽을 수 없는 등짝의 이력(履歷)”(〈사이〉)이 만들어지는 날들이 흘렀다. 그러나 “착한 새”가 되기 위해, 혹은 다른 무엇인가 되기 위해 얼마나 더 오래 “어둠을 뒤집어쓴 채”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무작정과 막무가내의 기다림 속에서 자기를 갉아먹으며 살아야 하는가.


고영(1966~)은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성장한 뒤 2003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동안 시집으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등을 펴내고, 최근 《딸국질의 사이학》을 냈다. 그의 시에는 가슴 치며 하는 후회와 자책의 말들이 많다. 이것들은 자아 성찰적이고 자기비판에 물든 자아의 말들일 텐데,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무엇보다 시인에게는 “당신은 어제의 태양 아래서 웃고/나는 오늘의 태양 아래서 웃고 있었다”(〈태양의 방식〉)와 같이 공집합되지 않은 채 엇갈린 인연들이 있고, 가슴에 담은 “불러야 할 간절한 이름들”(〈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이 많다. 살아온 세월의 두께보다 삶의 파고(波高)가 거칠고 높았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의 길이 “농담뿐인 생”(〈악수〉)과 “꿈조차 가질 수 없는 생”(〈민달팽이〉), 더러는 “벼랑을 품고” 사는 “꽃의 지옥(〈꽃의 지옥〉)”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무늬 없는 저녁”(〈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맞고, 상처를 감추려고 “뱀의 입속을 걸”으며(〈뱀의 입속을 걸었다〉), 삶에 개칠하지 않고 “조금 더 착하게 살기 위해서”(〈달걀〉) 암중모색하는 서정적 주체의 시들은 슬프고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