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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이종섶 시집 『우리는 우리』.

by 丹野 2024. 3. 26.

이종섶 시집  『우리는 우리』.시인수첩 시인선


슬프지도 않은 노래의 후렴에 (외 1편)

   이종섶


자신을 잊기 위해
굼벵이처럼 기어온 길을 되돌아가
유리를 깨고 초침까지 꺼내
낯선 기억을 정지시키는

얼굴 없는 형체가 힘없이
악수도 할 줄 모르는 손에 붙잡혀
속절없이 끌려가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고
울며울며 애원하던 날들
시장 바닥에 깔린 좌판대에서
싸구려 빗처럼 휘어지고

마지막 버스에서
뜬 눈으로 새우잠을 자며
깃털이 뽑힌 새들의 날개를 매단다

지붕 위로 불어대는 이빨 없는 바람의
시린 손

잊으면 잊혀진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상처의 파장이
어제를 용서하기 위해 멈춰 줄지 모른다

무심하게 굴러가다
애매한 경계에 서서 응시하는 눈동자들
감은 눈동자들



냉장고



시한부 인생들을
저장하고 나면
하나둘 아일랜드*로 떠나간다

햇빛을 보는 순간
자신을 선택한 사람을 위해 바쳐지는 목숨들

영혼은 흡수당하고
육체만 배설된다

*인간 복제를 다룬 영화.


             ―시집 『우리는 우리』 2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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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 / 경남 하동 출생.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6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바람의 구문론』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우리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