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 김경성
오동나무 통꽃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날 나는 맨발이었다
오래전 그 사람이 걸어서 과거시험을 보러 갔던
옛길이라고 했다
아직도 먹을 갈고 있는지
계곡물은 자꾸만 음표를 그려대고
새들은 기억 속의 지도를 펼쳐서
해찰 한번 하지 않고 산을 넘어갔다
비 그친 후, 수음문자로 적어 내려간 흙길
말캉한 가상자리에 발가락으로 쉼표를 찍었다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옛길의 이야기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나갈 것이고
내가 내려놓은 문장은 각주가 없는 쉬운 말이기를 바랬다
산벚꽃 흩날리며 자꾸만 온점을 찍어대고
5막의 문설주에 기대고 있던 나는
다 읽지 못한 앞 페이지의 문장을 생각했다
길을 걷고 온 며칠 후,
무엇에 베인 듯 발바닥 지문의 결이 갈라져서 사포 같았다
부드러운 흙길 속에는
지문을 잘라버릴 만큼의 날카로운 모래의 각이 있었고
나의 몸속에도 각주가 필요한 문장이 있었다
해독하지 못한 말들을 거칠게 잘라놓은 모래의 각,
남겨진 것들이 모두 부드러운 말言이기를 바라지만
부드러운 것은 그렇게 제 마음 속 보이지 않는 틈 사이에
각이 있다
장맛비에 흠뻑 젖은 흙길
아직도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당초문 그려진 책 표지만 바라보고 있다
-시집『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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