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숙 시인의 7편의 시
한 몸, 변주곡
한적한 공원 옆
등나무와 亭子가 서로 끌어안고 있다
등나무가 두 허벅지 힘으로
정자 기둥을 한껏 조이고 있다
이 외설적 체위에 얼른 눈 돌려도
유혹적 몸짓에 자꾸 시선을 빼앗긴다
몸을 배배꼬는가 하면 근육질 팔목을 끌어당기는
손도 없는 것이 발도 없는 것이
날리는 머리카락 매만지며
목덜미를 쓰다듬는가 싶더니 젖무덤을 파고든다
코도 없는 것이 저 몸도 없는 것이
서로의 호수에 살폿 빠져 바르르 떨고 있다
눈도 없는 것이 한가닥 눈썹도 없는 것이
한 몸에 거느린 간절한
돌이킬 수 없는 체위. 깊숙한
맛도 모르는 것이 멋도 모르는 것이
긁는 곳마다 꽃을 피운다
촉각도 없는 것이 미각도 없는 것이
등꽃 잎사귀
발그레 흔들리는 뜻 모를 진동
귓불도 없는 것이 혀도 없는 것이
안구 건조증
당신이 내게로 왔다가 간일을 은폐하느라
내 몸으로 통하는 모든 길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과거형일수록 슬픔은 무거워
나는 나를 자주 꺼내 읽지 못 한다
눈물이 실연의 어깨를 친다
콧잔등 타고
물컹한 목젖을 흘러내리는
당신은 4할 5푼의 젖은 독약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 별들이
당신 밖으로 미끄러진다
당신이 내게로 와
돌아갈 사랑을 잃었을 뿐인데
내 몸은 바짝 마른 강물의 형상이다
건기 주의보다
구멍가게
강원도 홍천 지나고 내면 지나
허름한 산골 가게
언제 열고 닫는지
깨진 창문에 비뚤비뚤
장난치듯 써있는 이름
구.멍.가.게
구멍 속은 궁금하다
구멍들은 오래된 온기를 품고 있다
바람이 바람을 빠져나오느라 입술 부르틀 때
소문이 가랑이 사이를 물고 늘어질 때
혼자된 여자가 조그만 구멍을 열며 닫으며
허리춤을 팔았다고는 하나
낙엽이 보았다고는 하나
한 번도 구멍 밖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떠도는 것이기는 하나
낭설이 구멍을 꽉 채운다
빗줄기에 젖는다
불편한 잠
잠은 감옥이다
감옥 안의 불타는 이불이다
불타는 이불이 밀어 올리는 뜨거운 창살이다
원통형으로 뒹구는 잠속에 갇힌 내가 있다
잠은 낮은 바닥을 어깨로 받치고
종신형을 사는 곳
어깨가 뜨겁다
썩으면서 즐겁게 피어난다
잠은 오래 된 율법이다
부패의 시작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잠을 찍어먹어 본다
잠이 나를 흘리고 있다
나와 내가 잠시 입술처럼 겹쳐진다
잠은 정리되지 않는다
낯선 발꿈치를 거침없이 문다
제 머리를 스스로 삼켜버린다
잠은 꿈틀거리는 늪이다, 미끌거린다,
깊숙한 식욕이다
강
거대한 짐승이다
묵직한 몸을 들어 올리며 기어가는
바람의 은신처다
깡마른 들판에 옷자락 찢기고 손등을 할퀸다
방향을 잃고 머리를 처박는다
은빛 비늘에 두껍고 단단한 가죽을 두르고
거만한 짐승 한 마리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꼬리인지 머리인지 만져본 적 없지만
아무도 저 짐승의 길을 막지 못한다
수억만 평의 대지를
일필휘지(一筆揮之)하고 있는
하늘 위, 날개 달린 짐승도
거대한 무게를 감당 못할 때
빛의 이마를 가르고
빗살무늬 가죽을 두르고 내려온다
사구砂丘를 읽다
삶이 시들해져 절벽 끝에 섰다면 이곳에 와서 온몸을 던져도 좋으리
파랑이 밀어올린 모래를 두근두근 감싸 안고 견디는 것을
달아나던 걸음 돌려 태풍에 맞서 무릎 안쪽이 다 까져있는 것을
청천벽력, 하늘의 무게를 한껏 받아 안고 뒹굴고 있는
저 중력을 보라! 포크레인 발톱 따라
갯메꽃 해당화 통보리사초 갯그렁 해방풍 순비기꽃 소리쟁이 어질어질
남미에서 떠밀려온 달맞이꽃까지 가뭄에도 젖가슴 마를 날 없다
서두르지 말고 주홍거미 개미귀신 물장군 금개구리 맹꽁이 큰주홍부전나비 문신한
어미의 팔에 안겨 보라 끊임없이 모래를 주고받아 건재한,
집 없어 머리 둘 곳 없다면 이곳으로 마실 한 번 와도 좋으리
넘실거리는 모래물결이 가난한 순례객들의 드넓은 행간이 되어 삶을 달굴 것이다
쉽게 삼키고 뱉는 세상이라지만 진력나지 않는 예도 있다
깊고 먼 심해에 심지를 두고 있어 총기聰氣 가득한 해안은 건기가 없다
슬픈 도형
젖은 흙을 열고 나온
커다란 왕 지렁이
기어간 만큼 죽음이다
죽음은 경계가 없어
앞과 뒤가 축축한 곡선이다
어릴 적 산수시간
삼각형 사각형 다각의 뿔 달린
도형을 그려나가다 보면
무덤처럼 닫히던 도형이 슬펐다
내 심장에 스키드마크처럼 줄이 그어지던
폐곡선 속의
죽은 언니가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