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시산맥> 하반기호에 실린 육근웅 평론가의 짧은 서평을 뒤늦게 옮깁니다.
석여공의 <잘 되었다>에 대한 글만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거룩한 말, 따뜻한 말
육근웅(평론가)
1. 눈을 뜨는 시인
시인은 눈 뜬 사람이다. 자신에 눈을 뜨고, 세상에 눈을 뜬 사람이다. 눈을 뜨기로 말한다면 시인만이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철학의 눈을 뜰 것이고, 화가는 화가의 눈을 뜬다는 점에서 눈을 뜬 사람들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시인의 눈뜸은 언어를 통한 눈뜸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언어를 통한 눈뜸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언어의 눈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음악가가 소리에 눈을 뜨지 않고 음악가가 될 수 없듯이 시인은 모름지기 언어에 눈을 떠야 그 언어에의 눈뜸을 통하여 세상에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색감(色感)에 눈을 떠야 좋은 화가가 되며, 음감(音感)에 눈을 떠야 음악가가 되듯이 어감에 눈을 떠야만 훌륭한 시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감(語感)은 단지 말의 감각적 자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감의 눈뜸은 말소리의 청각적 감각에 통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말뜻의 의미적 지각에 통달함을 뜻하고, 말의 이미지에도 통달하여야 함을 뜻한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이 놓이는 자리(환경 혹은 맥락)에 따라서 아름답고 추함이 갈리는 것처럼 시인은 말이 아름답게 자리할 곳을 통달하여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여공의 『잘 되었다(문학의 전당)는 말의 온도에 눈을 뜬 시집으로 기억될 것이요, ...(중략)
2. 말의 온도 - 석여공의 시
말은 나름의 온도를 지니고 있다. 아니,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말에 온도를 실어서 보낸다고 해야 더 바른 말일 것이다. 석여공의 말은 따뜻하다. 말이 따뜻하다는 것은 마음이 따뜻하기 때문일 것이며,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읽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오늘 거룩한 것 보았다
해 뜨기 전에 날던 새들
제 울음에 깃들어
해종일 나는 것을 보았다
-석여공, 「새」전문
하늘을 나는 새이거나, 나뭇가지에서 쉬고 있는 새이거나, 땅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새이거나 흔히 지나쳐 가며 더러는 안쓰러움을, 더러는 부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대상을 두고 석여공이 뜬 눈은 거룩하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던가. 석여공이 하늘을 나는 새를 ‘거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心淸淨이면 眼淸淨’이듯이 그 눈이 거룩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공초 오상순이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듯이 석여공은 ‘울음에 깃들어 / 해종일 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지니고 있다. ‘울음에 깃들’ 수 있다는 마음이 혹은 애처롭기도 한 일이지만 그런 삶을 거룩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뜬 시인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흥겹고 반가운 일이다. 어지럽고 힘겹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스스로 현기증을 느끼며 언짢음을 지울 수 없는 날에 제 울음에 깃들어 날 수 있는 새를 보여주는 석여공의 맑은 눈이 있어서 세상이 다시 한 번 따뜻해짐을 느끼게 된다. 진종일도 아니고 ‘해종일‘ 느끼게 해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세상에 칼날을 들이대는 이는 많아도 자신의 넉넉한 품에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이들이 드문 것이 이즈음의 세태이다. 눈이 어두운 이들이야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아랑곳 않고 목전의 이득만을 좇으며 살아가는 게걸스런 사회에서 눈을 조금 뜬 사람들은 남의 허물만 들추어서 할퀴어대는 게 세상살이의 구차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따뜻한 눈을 뜨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을 뜰 때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가을 햇빛은
꼭 잘 깎은 목탁 같다
그때 떠난 것이
잘 되었다
참 잘 되었다
가을이 내 안에서
얼굴 붉히며
익어갈 수 있으니
가만 두어도
내가 내 안에서
단풍 들 수 있으니
산빛 보며 혼잣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석여공, 「잘 되었다」전문
시인이 눈을 뜨는 일의 하나는 우리 앞에 익숙하게 놓인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전혀 다른 대상으로 바꾸어 드러내는 일이다. 그 하나가 비유로 말하는 것인 바, 석여공의 아름다운 눈뜸은 ‘가을 햇빛’을 ‘잘 깎은 목탁’에 비유하는 것에서 훌륭하게 성취된다. 석여공의 의도에 어긋나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잘 깎은 목탁소리가 삭발한 스님의 머리통을 두드리며 청아하게 울려오는 듯하다. 이런 공간에 안겨 산문을 지키는 이의 마음에 가을이 익어가며, 단풍드는 마음이 딱히 어떠한 것인지는 속인으로서 잘 짚어낼 수는 없지만 그 정경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가을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不二를 이룰 수 있어서일까? ‘그때 떠난 것이 / 잘 되었다’는 자기긍정을 노래하는 일은 본인 스스로의 만족을 떠나서 이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도 흐뭇해지도록 만드니 석여공은 이 시로써 法布施(엄밀히 말하면 詩布施이겠지만)를 하는 셈이다.
이런 긍정적인 말, 따뜻한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되어 ‘꽃 진 겨울 이마에 생바람 불어도 / 참 맑았노라’(「꽃 핀다 꽃 진다」). ‘어눌해도 좋아라 / 차 먹고 일어나면 / 짐짓 핑계대고 / 구들목 뜨신데 자고 가시라’(「불각사의 밤」)처럼 아름답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어떤 이는 그게 어지러운 속세의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럴 것이라고 트집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 시인을 수박 겉핥기로 보았을 때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절간 같은 고요’라는 시정의 말처럼 이 시인이 석불이 되어 누워있는 것이 아님을 다음의 시에서 익히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제 안에 홀로 달 뜨더란다
하도 크고 벅차서
그 달 품고
그래 울었더란다
아 나를 끌어당기는
저 애욕의 끄나풀
어찌하여 그대 안의 줄 팽팽히 뽑아
내 촉수의 간극에 꽂아놓고
파르르 떨고 있느냐
미안하다
그러고도 멀리
단칼에 끊지 못하는 흔들림아
미안하다
놓을 것도 없이 당길 것도 없이
그대 안에 둥실
달로 떠서 미안하다
-석여공, 「달」전문
달이 환기하는 상징적 의미망은 실로 다양하다. 문화마다, 개인마다 수많은 의미로 쓰이고 읽힌다. 그러나 보편상징의 측면에서 보면 달은 밤을 밝히는 등대이며, 스스로 성쇠를 겪으며 자라나는 나무이며, 항시 그곳에 떠서 어디에나 고루 비추는 月印天江이다. 그런 달이 되어서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마음이 안쓰럽다. ‘애욕의 끄나풀’에 얽히는 일이야 세속에서는 다반사이지만, 산문에서까지 그 때문에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하다니! 마음을 끊는 일이 誅心(벨 주, 마음을 베다. 여기서는 <마음을 끊는 일이 마음을 베는 것이 아님을>, 이렇게 읽어야 할 듯. 옮긴이 주)이 아님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이다. ‘사랑 깊더니 상처도 깊더라 / 내 안에 짙은 신열의 이 꽃멀미는 / 그대가 주인인가 / 내가 주인인가’에서도 중생을 어루만지는 마음자리가 선하다.
내가 아는 목수 신 씨가 꽃살문 새길 때는
끌 자루 거꾸로 쥐고 햇살 당겨
지 가슴팍에 꽃살 새긴다
꽃살문은 여래의 눈길이 닿는 곳이라고
보살이란 나를 해치고 너를 살리는 것이라고
허공중에 휘두르는 빈 칼질이라도
세상 아프게 하면 안된다고
햇살 당겨 지 가슴팍에 꽃살 새긴다
-석여공, 「금산사 꽃살문」부분
목수 신 씨의 끌질에 숨어 있는 보살행이 석여공의 어법을 빌면 ‘ 참 거룩한 것(「목요일 저녁에」)이다. 끌질을 해 본 사람이면 아는 일이지만 끌질을 하다보면 나뭇조각이 끌질하는 방향으로 튀어오를 때가 많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자신으로부터 멀리 튀도록 끌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신 씨는 끌의 방향을 자신의 가슴팍을 향하도록 끌질을 한다. ’빈 칼날이라도 세상 아프게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의 가슴을 향해 끌질을 하는 신 씨의 마음자리에서 ’꽃살‘을 보는 시인의 눈이 아름답다. 석여공도 아마 와편에 글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 글을 새기고, 그림을 새길 것이리라.
* 육근웅. 1973년 『풀과 별』로 등단. 시집으로 『주여 아직도』 저서로 『서정주시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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