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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스크랩] 어떤 정류장

by 丹野 2013. 6. 29.

 

[손민호 기자의 레저 터치] 아들이 물려받은 정류장 이름 … 시간은 머물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2013.06.28 00:05 / 수정 2013.06.28 00:05


# 2008년 9월 18일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 수확이 한창인 고랭지 배추밭 귀네미골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태백에서 35번 국도를 올라탄 자동차는 한껏 늑장을 부리며 가을 어귀 정취를 즐겼다. 길 양쪽으로 짙푸르게 익은 양배추밭과 띄엄띄엄 박힌 농가가 스쳐 지나갔다.

모퉁이를 막 도는 찰나, 외따로이 서 있는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사람 이름을 본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권상철 집 앞’. 버스 정류장에는 분명히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정류장 옆으로 얕은 개울이 흐르고, 다리 건너 파란 지붕의 농가 한 채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 주인을 찾았다. 밭에 나갔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버스 정류장을 알아봤다. 2006년 9월 15일 정류장은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태백시 삼수동 상사미마을에 있는 정류장 가운데 하나로, 근처에 표시될 만한 게 없어 건너편에 사는 주민 이름을 정류장에 새겼다고 했다. 하루에 14번 시외버스가 멈춰 선다고 했다.

# 2013년 5월 21일

 

손민호 기자
오랜만에 35번 국도를 탔다. 원래는 상사미마을까지 갈 계획이 아니었다. 야생화 만발한 검룡소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지만, 문득 그 버스 정류장이 떠올랐다. 10분쯤 더 달려 정류장을 찾아갔다. 정류장은 예전 그대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내려 정류장 앞으로 다가갔다.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권춘섭 집 앞’.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시 다리를 건너 농가로 들어갔다. 농가 지붕은 예전처럼 파란색이었고, 이번에도 정류장 주인은 만나지 못했다. 서울에 올라와 알아보니 버스 정류장의 원래 주인은 유명을 달리했고, 지금은 그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었다. 벌써 1년이 지난 일이었다.

사람 이름을 딴 정류장도, 그 정류장이 대물림한 것도 어쩌면 흥미 유발하는 뉴스였다. 그러나 주인이 바뀐 버스 정류장을 목격하는 건, 전혀 다른 정서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한참을 버스 정류장만 바라보다 돌아왔다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글쓴이 : 장자의 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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