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가장 아프다
[중앙일보] 입력 2013.05.04 00:48 / 수정 2013.05.0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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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그리스 비극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서 무대에 올려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의 속살과 그 원형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왕’과 더불어 가족사가 모든 비극의 원천임을 암시한다. 가장 가까운 이가 가장 큰 원수가 되고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혹독한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마치 공식처럼 되풀이하는 게 이들 그리스 비극의 원형질이다. 개개인이 착하고 착하지 않고의 본성적 문제는 사라지고 오로지 관계의 악마성이 빚어낸 얽힌 실타래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또 죽는다. 마치 그것은 늙은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크레온 왕에게 던진 말 속에서 나타나듯 ‘신이 파놓은 함정’에 다름 아니다.
# 어쩌면 우리가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도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리라. 그러니 그토록 사랑해 죽고 못산다며 결혼한 이들이 원수보다 더한 처지가 되어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아이들에게마저 깊은 상흔을 남긴 채 갈라서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미치도록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도 언젠가 내게 그 사랑의 영수증이 청구될 것임을 알아야 마땅하지만 어디 인생살이가 그렇게 명민하던가. “사랑에 빠지다(fall in love)”라는 말이 기실 “함정에 빠지다”와 같은 의미라는 것은 혹독하게 겪어본 후에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 비단 남남이 만나 사랑해서 이루는 부부의 관계만이 아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안티고네가 산 채로 아귀처럼 갈라진 땅 속에 파묻히자 그녀의 약혼자 하이몬은 그렇게 만든 아버지 크레온을 저주하며 땅바닥에 창을 꽂고 그 위에 자기 몸을 찔러 죽는다. 크레온은 자신의 모든 것이라 여겼던 아들 하이몬이 자기 앞에서 “악행으로 나를 기른 비정한 아비여, 나의 죽음이 당신에게 가장 큰 복수가 되게 하리라”며 절규하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뜬 채 목도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그것은 아비를 향한 아들의 가장 처절한 복수요, 저주였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글쓴이 : 장자의 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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