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송호근 칼럼/ 제사를 회상함
[중앙일보] 입력 2013.02.12 00:25 / 수정 2013.02.12 06:47
사회학설을 잘 쇠셨는지, 오랜만에 친인척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기억을 갖고 돌아오셨을 터, 이참에 오백 년 전통에 항거한 무용담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필자가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조상도 모르는 놈!’이 된 사연을 말이다. 부친은 이 말을 달고 사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과 자웅을 겨루느라 제례를 과도하게 발전시킨 영주(榮州) 출신이라 더욱 그랬다. 부친은 호를 아예 효응(孝應)이라 지으셨다. 효로 조상 은덕에 응하면서 사시는 신조는 탓할 바 아니나 그 실행 의무가 베이비부머인 장남에게 온통 실린다는 게 문제였다. 유교 문화의 막내 세대, 그것도 충효사상에 세뇌된 베이비부머에게 부모의 신념과 조상숭배는 종교였다. 그러니 종교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면 불화다. 오십 줄까지 효응 선생의 신조에 착실히 응하던 중 불경스러운 회의가 들었다. 이 많은 음식, 투여한 노동, 친인척의 출석, 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허망함은 도대체 뭐지? 제사 후 느긋하게 음복하시던 효응 선생의 표정과는 달리 장남의 지식창고에는 반란이 싹텄던 거다. 반란은 곧 기획연구로 이어졌는데 제례를 창안한 조선 유교의 비밀을 기어이 밝혀냈다. 그것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실행 방식이었다.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경복궁 좌측에 종묘를 지어 조상숭배의 기초를 마련하고,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곡식신과 토지신에 길운과 풍년을 빌었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설 제사를 정중하게 지낸 후 필자는 연구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유교가 종교 기능을 벌써 상실했고, 한말(韓末)을 기준으로 친가, 외가, 처가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분명하므로 이제 제사는 무용하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소멸됐음을 부가했다. 주자학 선조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백리 안에서 사셨던 효응 선생의 표정은 곧 험악해졌고, 베이비부머의 반란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그 최후통첩에 결국 무릎을 꿇는 게 오륜(五倫)의 도리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만 베이비부머의 합리성을 발동하고야 말았다. ‘저의 앎과 지식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세대 간 전선에는 화염이 인다. “조상도 모르는 놈들!” 철저한 사전 모의에도 불구하고 이 호통 하나로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성곽으로 투항했고, 장남에게도 얼른 항복하라는 묵언의 신호를 보냈다. 필자는 제사 간소화론으로 타협에 나섰지만 효응 선생은 분노에 치를 떨며 노구를 끌고 귀가했다. 협상은 깨졌다.
필자는 연구결과를 칼럼에 썼다. 며칠이 지나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동 태생의 70대, 명문대 출신 공무원이었다고 밝힌 노신사의 질문은 이랬다. “사실 나도 제사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역사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경로를 말했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했다.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투항했다. “나도 그렇게 할랍니다!”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결렬된 협상의 작은 전리품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한 평화다. 그러니 ‘조상도 모르는 놈!’을 되뇌고 계실 효응 선생이 걸린다. 설은 잘 쇠셨는지, 일가 친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갖고 돌아오셨는지, 귀성객들이 보낸 고향의 설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7. [여성운동가 고은광순
"제사는 양반문화 모방한 가짜전통…제사 대신 가족모임을"
"차례나 제사는 남녀노소가 어우러지는 문화가 아니에요. 남자들은 자기 부모 늙으면 기저귀 한 번 안 갈아 주고 아내에게 '리모콘' 효도를 시키죠."
여성운동가 고은광순(58)씨는 2009년 10월 "아이들아 내 제살랑 지내지 마라"라고 외치며 '제사 거부 운동'에 나섰다. 고은씨에게 제사란 뿌리도 전통도 없는 '허례허식'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제사'가 우리의 전통 문화가 아닐뿐더러 가부장적인 제도만 강화하는 폐습이란 것이다. 고은씨는 '호주제'가 하드웨어라면 '제사'는 소프트웨어라고 했다. 90년대 여성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호주제 폐지와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 등에 나선 그로서는 '제사 거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상제사는 3300년 전 중국에 '조갑'이 아버지 명을 어기고 형을 죽여 왕권을 차지한 걸 합리화하려고 시작한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이성계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흉내 낸 거고요. 평민이 따라하면 데려다가 곤장을 내릴 만큼 독점적인 행사였어요. 세상이 바뀌고 너도나도 양반을 모방하면서 자리 잡은 가짜전통이죠"
그렇다고 고은씨가 모든 사람에게 '제사 거부'를 권하는 건 아니다. 강요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그는 안다. 고은씨가 만든 '제사 거부' 인터넷 커뮤니티도 지난해 9월 이후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고은씨 주변에도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여성들은 친인척 관계에 묶여 있잖아요. 여성 리더라는 국회의원들도 명절만 되면 '평범한 며느리 입니다' 해야 표가 나오거든요. 지금 우리들이 선언해야 합니다. 내 자식들, 내 며느리에게는 이런 짐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고은씨는 스스로 조용하지만 강한 변화를 실천하고 있다. 몇 해 전 운영하던 한의원을 정리하고 아픈 어머니와 함께 충청도 갑사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모시고 싶어서였다. 돌아가신 후에는 무덤 없이 한 그루 나무 아래 묻어드렸다.
일부는 이런 주장을 드센 여자들의 '귀차니즘'(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고은씨는 '멍청한 것에 대한 지혜로운 대안'이라고 응수했다.
"제사는 첫째 아들 집이 맡는데 첫째 며느리가 죽으면 제사상 차릴 사람이 없다고 둘째 집으로 넘어가요. 그런 식으로 여자들에게 책임이 부과되는 거죠. 철저히 남자 집안의 행사인데도 말이에요."
대다수 가정의 명절 모습이 그렇단 얘기다. 장보고 음식하고 차례상 차리는 게 가장 주요한 행사다. 그 이후엔 남자끼리 여자끼리 아이들끼리 흩어져 시간을 보낸다. 남자들은 화투치고 여자들은 남편 흉보고 아이들은 게임이나 하는 식이다.
고은씨는 '명절' 덕분에 친척들이 그나마 얼굴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명절' 탓에 오히려 가족 모임을 안 만든다고 지적했다. 명절이 일종의 '면피'가 됐다는 뜻이다.
"한 해 동안 제사를 12번 지낸다는 분도 있는데 한두 번으로 모아서 하고 나머지는 가족 운동회, 가족 여행을 가는 게 어떨까요. 살아있을 때 추억을 많이 만들고 살아있음을 즐길 줄 알아야 회한이 없는 것 아니겠어요? 돌아가신 다음에 관이나 수의 비싼 거 해드리면 뭐 하나요."
고은씨는 책을 통해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세상의 절반 여성의 이야기','시골 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 등을 펴냈다. 지금은 공동 집필로 '제사의 허구'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고은씨는 '끝'보다는 시작을 보자고 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인도 탄신일을 축복하고 살아서 세상에 전한 메시지를 기억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설은 1년을 시작하는 날이잖아요 가족들이 모여서 시작을 축하하고 출발을 이야기 하고. 새해 계획 포부 희망을 나누면서 격려하고 축복하고 그런 날이 돼야 하죠. 한마디로 살아있을 때 서로 감동하고 행복하자는 이야기예요." 머니투데이 황보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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