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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재현의 변증법, 시뮬라크르의 반복 복제 / 이영욱

by 丹野 2013. 1. 31.

 

 

         모방(mimessice)과 재현(representation)의 변증법,

         시뮬라크르(simulacre)의 반복 복제

 

 

                                             이영욱(연변대학 예술학원 미술계 촬영과 교수)

 

 

                      세리 레빈, 뒤샹 이후, 1991.

 

더 이상 작가는 직접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는 작가의 수공예적인 장인적 솜씨를 과거처럼 자랑하지 않는다. 화가와 조작 가는 더 이상 작품의 대상을 누가 더 잘 그리고 만들었는가의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받지 않는다. 심지어 작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지 않아도 예술로 인정받는다. 예술세계 지난 호에 거론된 뒤샹(Marcel Duchamp)의 레이디메이드(ready made)변기작품 <샘>을 미술관에 가져다놓은 행위가 바로 가장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실제로 조각가는 설계도를 작성해서 공장에 가져다주면 공장의 인부들이 작가가 원하는 데로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들어준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인정받아야 할 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공장의 기술자들이다. 회화도 마찬가지다. 화가가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작품으로 얼마든지 인정된다. 누가 그림을 직접 그리고 조각을 만들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역시 사진의 경우도 사진가가 직접 촬영하지 않아도 작가로써 인정받는다. 이처럼 작가가 직접 제작하지 않은 작품이 예술행위로써 인정되는 현대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원인의 제공자는 현대미술이 사진을 제작하는 과정을 똑같이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술발견 초기에 사진은 기존의 미술의 미학적 담론과 형식을 모방해서 예술이 되고자 했다. 이제 현대미술은 꺼 꾸러 사진을 모방해서 예술이 되고자 한다. 현대미술의 현상은 따지고 보면 사진작품을 제작해서 예술로 인정받는 행위와 그대로 닮아있다. 즉 현대미술의 제반 양상과 특성이 사진매체의 특성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현대미술의 모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진이 예술로써 인정받기까지의 미술과의 상호연관성과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다.

애당초 사진의 경우는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의해서 현상과 인화 작업은 대부분 현상소에서 진행되었다. 촬영행위 또한 카메라의 자동기계 속성상 수공예적인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처음부터 작가의 장인적 솜씨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진은 예술로써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근대이후 낭만주의 예술관은 천재적인 정신과 장인적인 기예를 동시에 가진 자를 예술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대 현대미술은 대상을 똑같이 '그리고', '만드는' 것을 포기 했다. 대상을 닮게 재현하는 모방론에서 벗어난 현대미술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솜씨 좋게 재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추상미술이 대상의 외형을 유사하게 모방 재현하는 환영주의(illusionism)미술을 포기하고 미술자체의 본질적인 속성을 찾아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상징적인 미술로써 도상적인 상태의 예술작품이 되고자 했던 서양 미술의 전통은 이제 현대미술에 와서 작품을 창작하는 주체로써의 작가 뿐 아니라 작품 속에 담겨진 의미 또한 '텅 빈 상태'를 만드는 중성적 오브제(objet)사물이 된다. 그 대신 현실에 없는 창조적인 관점에서 미술은 독자적인 그 자체가 되었다. 물론 고대로부터 예술가의 정신(이데아에 도달하기위한)은 장인의 솜씨를 초월한 그 무엇 이어야 했다. 이러한 관념은 낭만주의 예술관(예술작품은 천재적 산물)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예술일반에 관한 상식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화가가 직접 그리지 않은 그림, 조각가가 직접 조각하지 않은 조각, 기존의 물건을 미술관에 작품으로 내놓는 행위, 심지어는 세리 레빈(Sherrie Levine)처럼 다른 누군가의 창작품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신의 작품이라 주장하고도 예술로 인정받는다. 복제수단으로써 완벽하게 현실의 외형을 재현한다고 믿고 있던 사진은 플라톤이후 끊임없이 따라다닌 미술의 모방론적 예술 관념을 완벽하게 실현시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찬찬히 따져본 결과 사진은 가장 이데아에서 멀어진 복제의 복제로써 '시뮬라크르'(simulacre)임을 깨닫게 된다. 사진은 '가짜'이면서 '진짜'인척하는 뛰어난 복제의 복제로써의 시뮬라크르는 현실을 모방한 것도 재현한 것도 아닌 그 자체가 현실이 된다.

 

 Warhol Andy,  Campbell's Soup Can,  1962.

 

 '시뮬라크르'는 프랑스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프랑스의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확립한 철학 개념으로 원래 플라톤에 의해서 제시된 이데아(Idea)와 구별되는 철학적 명제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원형인 이데아, 복제물인 현실, 복제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현실은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을 다시 복제한 것을 말한다. 이데아를 복제한 현실을 모방 재현한 미술은 그럼으로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복제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복제되면 복제될수록 진짜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한 순간도 자기 동일로 있을 수 없는 존재, 곧 지금 여기에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모방론은 원본에 얼마나 더 가깝게 복제했는가가 중요한 가치평가를 받는 것으로 가능하면 원본과 가장 가깝게 닮아있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좋은 것이고 뛰어난 예술작품이 된다.

그러나 들뢰즈가 생각하는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니라, 이전의 원본이나 실재를 복제한 복제물과는 전혀 다른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델의 진짜 모습을 복제하려 하지만, 복제하면 할수록 모델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단순한 복제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를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 가는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의 개념은 원본과 복제는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복제가 원본을 닮아 있지만 절대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제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자율권을 가지고 원본과는 다르게 그 자체의 존재론적인 지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흉내나 가짜(복제물)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가 가진 또 하나의 측면은 사건이다. 사건이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그 것은 존재론적으로 흥미로운 위상을 가지고 있다. 사건은 마치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잠시 나풀거리다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짧은 그 찰나는 논리적으로 '의미'를 영원불변으로 고정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사건이란 무엇인가를 형상화하는데 원인제공자로써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다는 점에서 그것은 바로 '시뮬라크르'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가 '시뮬라크르'를 의미와 연계시켜 사건으로 다루면서 현실과 허구의 상관관계를 밝힌 이후, '시뮬라크르'는 현대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지점 역시 '시뮬라크르'이다.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인 이데아론에 따르면 완벽한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현실이고, 예술은 현실을 다시 한 번 모방, 복제하는 '복제의 복제'다. 가령 사람을 그린 회화 작품은 이데아를 복제한 불완전한 인간을 다시 또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불완전한 '가짜', 즉 '시뮬라크르'이다. 플라톤은 그토록 복제의 복제인'가짜'개념인 '시뮬라크르'를 이데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저급한 존재로 '무규정자로'로 정의하고, 그의 저서<국가론>에서 추방해야할 대상으로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자로써의 예술가를 거론한다. 예술가는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계를 복제하는 자로 결국 '시뮬라크르'를 만든 거짓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들뢰즈는 '시뮬라크르'의 복권을 시도해서, 반-플라톤주의 관점을 제시했다. 반-플라톤주의 관점에서 볼 때, '무규정자'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모든 세상의 배경임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진리의 개념이 성립 되도록 하는 '잠재 태'로써 기능한다. '참'이 존재 하기위해서는 그와 대립되는 개념의 '거짓'과 '가짜'가 존재해야 '참'이 성립되는 것처럼 말이다. '참'은 스스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참'의 개념이 더욱더 선명하게 부각되기 위해서는 '거짓', '가짜'의 개념인 '시뮬라크르'가 그 스스로 더 선명성을 들어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 때 '시뮬라크르'의 진정한 개념적 정의는 '거짓'이 '참'으로 둔갑해서 자신의 '가짜'임을 스스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짜'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 한다. 이 때 '진짜'는 좋은 것이고, '가짜'는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관념은 더 이상 그 힘을 상실하게 된다. 진리에 대한 '참'의 개념과 동시에 '가짜'의 개념인 '시뮬라크르'는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양축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그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규정자인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플라톤주의 담론에서 저급한 복사본의 위치로 전락되거나, 형상작용(이데아)을 이탈하는 개념으로만 지칭되는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천지 창조적인 카오스(규정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 혹은 생성(무한 한 가능성을 내포한)등과 같은 어떤 발생적인 근원의 힘이 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플라톤이 말했던 근원적인 존재자 즉, 자기스스로 존재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토록 하는 근원으로써의 일자(一者) 즉, 이데아와 꼭 닮아 있다.

들뢰즈의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아직 의미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무의미'의 상태이지만, 점진적으로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서 형상화 시키는 '진짜'의 개념 속으로 의미를 부여받는 문화적 영역으로 계열화되기를 기다리는 상태이다. 그럼으로 '시뮬라크르'는 진리를 모방하는 혹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계를 단순히 복제한 것이 아닌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 없는 복제의 복제상태로 '의미체계'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성활동을 하다가 결국은 우리의 사회 속에서 '의미'를 부여 받게 되면 더 이상 '무규정자'로서 시뮬라크르가 아니게 된다.

 

 Roy Lichtenstein, Whaam, 1963.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현대미술이 가장 중요한 예술적 재현대상은 특별한 사건의 보편화된 의미가 아니라 사건 아닌 사건으로서 논리와 상식 밖의 개념적 즉 인식 영역에서 구체적이고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말하는 '무규정자'로서의 '시뮬라크르'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적으로 규정되지 않았을 뿐 엄연히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질료로서 작용한다.

사진은 현실을 시각적으로 똑같이 닮게 모사하도록 만들어진 재현 장치다. 현실을 복제한 사진은 그러나 사진에 찍혀진 화면과 실재의 현실을 직접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크다는 것 또 한 알 수 있다. 즉 사진은 현실을 모방하고 재현했지만, 단지 그 외형만 닮게 복제한 이미지에 불가하고 생생한 살아 숨 쉬는 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만약 사진에 찍힌 대상을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이라면 그 사진속의 실재하는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진짜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렀다면 사진 속에 찍혀진 이미지는 독자적인 의미를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사진은 하나의 또 다른 현실적 체험을 제공하는 원인제공자가 된다. 바로 이 처럼 현실을 복제했지만, 이 복제된 현실이 '진짜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때 이것을 쟝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시뮬라크르 개념으로 정의 한다. 보드리야르는 복제의 복제인 '시뮬라크르'가 원본을 대치해서 진짜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행세를 할 때 우리사회는 가상의 현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고, '원본'이 오히려 복제물들을 복제해서 실재'원본'이 변형되는 사회를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소비사회로 보았다.

사진은 원본이 없다. 하나의 필름 속에서 복제된 수많은 똑같은 이미지를 가진 수십 장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다. 최초로 인화된 첫 장의 사진을 원본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진의 최초의 모델이 된 현실을 원본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은 이데아를 복제한 것이고 그 현실은 또 다시 복제된 현실들을 무수히 반복 복제하는 현실 속에서 사진의 대상이 된 현실의 모델이 원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은 단지 현실을 닮은 유사한 이미지일 뿐이다.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가 전 세계에서 배급되어 상영된 영화들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최초로 상영된 영화와 헐리우드에서 상영된 영화가 원본으로서 더 감동적인 아우라(aura)를 만들어 낼 수 없듯이, 기계적으로 복제된 영상은 원본 없는 복제의 복제일 뿐이다. 사진술이 발명된 이후 지금까지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을 대체하는 표상체계로 자리 잡아 왔고, 이제는 경험 자체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보드리야르가 설명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육안을 통한 경험과 가장 유사한 표상체계를 만들어내는 사진 이미지가 대량 복제성을 가지게 되면서 도래하였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표상을 통한 경험을 마치 실제의 경험인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힘이 사진 이미지에 존재하는 것이다.

 

 Andy Warhol ,  Coca-Cola Bottles, 1962.

 

  팝아트(Pop art)로 유명한 앤디워홀(Andy Warhol 1929~1987)의 작품에서도 '시뮬라크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의 작품 마릴린 먼로, 코카콜라, 캠벨스프 등은 워홀의 공장(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불렀다.)에서 끊임없이, 수 십장, 수백 장이 찍혀 나왔다. 그는 사물 사진을 찍고, 그것을 실크에 도안하여 사진을 복제, 그 복제한 것을 또 다시 복제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워홀 작품의 주제나 소재들은 콜라 병, 수프 등의 대중적이고 흔하게 볼 수 있는 비개성적인 사물과 대중적인 연예인 스타와 정치인,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같은 옛 대가들의 걸작 등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에서 택했다. 제작 방법역시 자동 기계복제방식인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사진처럼 무수한 복제가 가능하고, 누가 제작하든 상관없는 작가의 개입이 배제된 익명성, 복수의 형태로 진행하는 반복성이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준다. 더욱이 제작 과정에서 보조자를 채용하고, 작품에 타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전통적인 창작자로써의 예술가의 권위에 도전했다. 더군다나 다른 작가들이 만들어낸 창작품을 그대로 복제해서 예술이란 재능 있는 특별한 개인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미지를 반복 나열함으로써 이미지가 가지는 개성, 충격, 감동 등을 제거해 중성적인 상태로 이끌었다. 사실상 앤디 워홀의 작품 자체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기란 힘든 일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anjamin)의 말처럼, 기계적인 복제는 ‘아우라’, 즉 원본에서 오는 감동을 제거해서 소독했기 때문이다. 워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작품의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거기에 맞춰 고용된 직공들의 손에 맡겼다. 이로써 작가의 인격은 사라지고, 작품은 불현듯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의 성격을 띠게 된다. 워홀의 작품제작 방식은 그럼으로 전통적인 재현방식인 대상을 모방하고 묘사하는 일루젼(환영)의 드로잉솜씨를 뽐내지 않는다. 그 대신 뒤샹처럼 오브제를 제시하는 개념을 생산하는 제작자로써의 사건을 '시뮬라크르'로 연출하는 예술가가 된다. 그 결과 창작주체로써의 작가는 사라지고 수용자의 중심의 '의미'를 생산하는 감상자의 주체적 시각이 필요한 벤야민의 전시효과가 발생 하는 것이다. 워홀의 반복된 <코카콜라>이미지는 실재의 코카콜라를 모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워홀의 <코카콜라>는 스스로 서로를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원본인지 말할 수 없다.

 

 앤디워홀, 마를린 몬로, 1962.

 

따라서 워홀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중이미지들은 원작을 모방하거나 복제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워홀은 분명이 복제기술을 사용했지만, 사진 이미지처럼 현실을 재현하거나 모방한 혹은 단순 복제한 것이 아닌 완전히 현실과는 다른 독립적인 이미지로써 의미를 생성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의 '시뮬라크르'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복제한 것으로 무한 생성의 복제가 원본이 없는 복제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그러나 현실처럼 작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단순히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진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는 상태의 사진의 진실성 혹은 사실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미지의 '무의미' 옵튜스(obtus)를 지칭하는 기호학적으로 탈 코드화된 이미지의 무의미성을 '시뮬라크르'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에 찍혀진 대상에 대한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현실세계를 정확히 복제하고 닮아 있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이 이미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사진에 찍혀진 대상이 무엇인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연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연변을 사실적으로 찍은 가장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진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는 그 사진을 보고 이곳이 연변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사진은 그것을 보는 관객의 인지 가능한 앎의 정도에 따라서 그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그럼으로 의미론적으로 사진은 '텅 비워'있는 것이 된다. 바로 이것이 사진의 '시뮬라크르'이다. 물론 사진은 엄연히 과거에 한 때 존재했던 사실의 흔적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사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전제 조건으로 이미 사실적인 의미체계(code) 속에서 인정되는 한에서 가능하다. 사진이 사실을 증명하는 탁월한 매체라는 신화는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찍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플라톤이 모방론처럼 사진이라는 매체가 이데아에 근접한 탁월한 모방매체여서가 아니라 사진을 객관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매체로 인정하는 약속된 기호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마치 투명한 상태의 거울 이미지와 같다. 사진은 아무런 말이 없고, 반사되어 돌아오는 '의미'는 언제나 왜곡된 거울의 상태정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이 그것을 가르쳐 주었을 때만이 가능한 것처럼,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자신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리체계(약속된 기호)와 사실의 변증법적인 관계의 '의미'의 논리만이 그것을 믿도록 만든다. 결국은 현대미술은 사진처럼 현실을 모방 하는 미술의 재현행위가 재현의 변증법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형성된 진리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시뮬라크르'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현대미술은 더 이상 플라톤의 모방론적 예술관은 그 권위와 힘이 상실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미술에서, 예술 작품은 복제가 원본을 흉내 내어 어떤 대상을 재현하고 지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대상과 예술 작품 사이의 유사(類似)적 관계는 동시대 현대미술에 와서 특히 워홀의 작품에 와서 순식간에 원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복제품들 간의 상사(相似), 즉 '서로 닮음'의 관계로 변하게 된다. 이 ‘상사’의 복제품, 원본이 없는 복제품인 현대미술은 원본의 정체성을 가진 '오리지날' 미학의 '숭고'미의 엄숙함과 무거움이 없다. 대다수 많은 현대 미술가들은 고전적인 대가들의 작품을 드러내 놓고 모방하거나, 동시대 작가들 간 에도 서로가 서로를 모방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자신의 과거 작품을 또다시 복제하는 무한 증식의 '시뮬라크르'는 '숭고'미와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가벼움의 극치를 이룬다. 물론 현대미술이 절대적으로 '숭고'미를 버리고 대중적인 기호에 영합하는 가벼움만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의 예술에서 지향하는 엄숙함의 지고지순한 순수미술의 무거움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현대예술의 특징은 지극히 존재론적으로 가볍다. 그것은 '흉내내기(parody)'의 전략으로 창조적인 신화를 버리고 끈임 없이 차이의 전략으로 점철된 '진짜'와 '가짜'의 위계질서를 파괴한다. 그럼으로 현대미술은 모방의 저급함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진짜인 것이 없고, 모방 아닌 것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원본의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가치평가를 높게 평가했던 과거 예술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글: 연변대학 예술학원 미술계 촬영과 교수 이영욱

 

상명대 사진영상학과 외래교수
인천사진 아카이브프로젝트 디렉터

 

 

출처
이양욱의 사진보기와 사진읽기

http://blog.daum.net/lee-young-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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