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와 시물라크르
진 중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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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와 함께 미학적 성찰의 중심을 이루다가 헤겔 이후 사라진 '숭고.' 이 미적 범주가 최근에 부활했다. 료타르가 대상성을 상실한 현대 예술의 정신을 '숭고'의 미학으로 규정한 이후, 최근 이 잊혀졌던 개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예술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회화는 대상성을 잃고, 음악은 조성을 포기하고, 시는 무의미해졌으며, 연극은 부조리해졌다. 도대체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의 징후일까? 현대미학은 바로 이 물음에 답변을 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이 시대에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료타르는 먼지 덮힌 미학사 속에서 '숭고'의 개념을 다시 끄집어낸다.
료타르에 따르면 현대예술은 숭고의 부정적 묘사다. 하지만 20세기의 예술을 '숭고'의 미학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게다. 현대에도 리얼리티의 묘사를 포기하지 않은 구상회화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료타르의 이론의 적용범위를 굳이 비구상 회화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게다. 하지만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회화의 복잡한 상황을 '숭고'의 개념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한 단순화로 보인다. 사실 현대 회화에는 '숭고'를 지향하는 경향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경향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시뮬라크르, 즉 원본 없는 복제의 계열화를 지향하는 흐름이다. 현대회화를 낳은 세계감정은 숭고와 시물라크르, 이 두 개의 서로 보족하는 개념으로만 적절히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에게 세계는 현상계와 예지계로 나뉘어 있었다. 이 낡은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이 언어학적 전회를 거치면서 기호학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었을 뿐, 이 두 세계의 간극은 오늘날에도 극복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는 듯이 보인다. 이 두 세계의 대립,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이 오늘날 철학에서도 기호학적, 언어철학적, 해석학적으로 변주되면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정신은 예술에서도 반복된다. 일반화에 늘 따르기 마련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칸트가 '현상계'라 부른 세계에 대한 감정은 현대 예술에서 '시뮬라크르'의 계열적 작품들로 표현되고, 그가 '예지계'라 부른 것에 대한 예감은 숭고의 미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사 물
벤야민은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을 '현대'(Moderne)라는 시대의 징후로 보았다. 그에게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나타남"이었다. 이 속의 "나타남"이라는 낱말을 '현전'(pr sence)이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게다. 기술복제는 아우라를, 즉 현전의 체험을 파괴한다. "유일성과 지속성"을 가진 원작과는 달리 기술복제의 산물들은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장구한 수용과 해석의 역사를 제 몸에 지닌 채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으나, 대량으로 복제된 그것의 허깨비들은 시공의 구애를 받지 않고 도처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복제는 단지 원작을 베끼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원작의 존재를 위협하여, 마침내 현실 혹은 현실감의 상실을 가져온다. 복제물은 이렇게 "사물의 역사적 증언가치"를 위협하고, 그 결과 "사물의 권위"를 위험에 빠뜨린다.
벤야민이 살던 당시에 복제기술은 단지 원작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이미 예술창작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 드가는 벌써 창작에 사진을 활용하고 있었다. 팝 아트의 등장 이전에 예술에서는 이미 물성의 상실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인상주의 회화에서 사물은 사라진다. 가령 모네의 <루앵 성당> 연작을 생각해 보라. 사물의 색은 빛의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리얼리티는 것은 단 한 번에 포착될 수 없다. 때문에 현실을 포착하는 것은 오직 연작의 계열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결과 모네의 손에서 돌로 된 스콜라 철학은 견고한 물성을 잃고 물 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여러 장의 시뮬라크르들로 해체된다. 여기에 다시 견고한 사물성을 되돌려주려 한 세잔느는 사물의 마지막 구원자였다. 이 마지막 구원의 시도가 좌초한 지점에서 재현을 포기한 현대예술이 시작된다. "시뮬라크르는 단순히 하나의 복사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복사물의 개념 그리고 모델의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들뢰즈가 플라톤을 대신하여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벤야민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이 우려하고 벤야민과 들뢰즈가 환호한 대로, 복사물의 존재는 원작을 단지 베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작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마침내 원작의 권위를 파괴해 버린 복제는 원작을 닮을 의무에서 풀려 나와 자유로이 유동하는 시뮬라크르가 된다. "유일성과 지속성"을 갖고 있었던 사물의 세계는 서서히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대체되어 간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아우라가 파괴되고 "사물의 권위"가 무너진다. 이것이 벤야민이 포착한 현대의 징후, 즉 전통과 뿌리를 상실하고 대도시의 아케이드를 부유하는 '현대인'이 느끼는 세계감정이다.
이 징후를 벤야민은 기술의 진보로 실현된 민주주의 문화로 보았다. 반면 하이덱거와 같은 문화보수주의자에게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몰락의 징후일 뿐이었다. 시뮬라크르는 그저 미학적 현상이나 인식론적 현상을 넘어 어느새 우리의 생활세계를 규정하는 존재론적 현상이 되었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회성과 지속성"을 갖는 장인적 공예를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기성품의 대량생산으로 바꾸어 놓는다. 양복점, 제과점, 구두점 등 주위에서 흔히 보던 수공적 생산은 표준화된 취향에 따르는 프랜차이즈로 대체된다. 한 동안 예술작품은 자본주의하에서 유일한 수공적 생산의 영역으로 남았으나, 그것도 잠시, 뒤샹은 대량생산된 레디메이드를 예술에 도입함으로써 유일물을 생산하는 예술가의 장인적 창작마저 해체시켜버린다. 그리하여 또 다시 "위험한 상태에 놓인 것은 사물의 권위다."
기 호
줄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기호학이 가진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을 지적한다.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규정했다. 이때 한 기호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물론 초월적 기의의 의식내적 '현전'일 것이다. 여기서 소쉬르는 아직 근대의 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소쉬르는 '기호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기호와의 대립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 경우 기호에 의미를 주는 것은 초월적 기의, 즉 기호의 밖에 있는 세계의 '현전'이 아닐 것이다. 그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리라. 기표는 기의와 결합됨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기호와 차이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에서 근대의 형이상학자 소쉬르는 돌연 모습을 바꾸어 탈근대적인 차이(diff rance)의 철학자로 나타난다.
낱말의 의미가 '차이'에 있다면, 설사 '현전'의 체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눈앞에 '현전'하는 그 '기의'는 더 이상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구조화된 언어 '내재적' 현상일 것이다. '내재적 기의'란 결국 기의가 아니라 또 하나의 기표, 또 하나의 기호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새로운 기표의 의미는 다시 또 다른 '내재적 기의', 즉 또 하나의 기표에 의존할 것이다. 이렇게 기표가 마침내 최종적 기의에 도달하는 것은 무한히 연기된다. 하지만 무한히 소급을 해도 기표가 바깥으로 초월의 도약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표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의가 또 다른 기표에 불과하다면, '기표+기의'라는 기호의 정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리하여 지붕에 올라간 후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했던 어느 철학자처럼, 아니면 자기가 사용한 낱말에 X 표를 했던 어느 철학자처럼, 데리다는 우리에게 어느 단계에선가 '기호'의 개념을 버리라고 제안한다.
데리다가 선언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붕괴'는 이미 현대예술에서 재현의 붕괴로 예고되었다. 회화의 이념도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규정되는 것이라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근대회화는 '환영주의'의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회화는 가시적 세계의 시각적 재현이며, 그것의 진리성은 원본과의 일치에 있었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헤겔의 예언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20세기에 들어와 회화는 그 전의 어느 시기에도 없었던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오늘날의 회화는 외부 세계를 재현하기를 포기하고, 순수한 형태와 색채의 유희가 된다. 추상회화는 더 이상 사물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그 닮음을 통해 그림 밖의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현대 회화는 그림 밖의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된다. 현대회화가 지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흔 적
'재현'에 근거한 근대의 환영주의 예술을 포기한 이후 현대의 예술가들의 창작은 중세의 장인의 그것을 닮아간다. '아직' 사물과 기호가 두 개의 존재질서로 나뉘어 재현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던 중세에, 장인들은 가시적 대상의 재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창작을 무엇보다도 '재료의 처리'로 이해했고, 이는 '이미' 근대의 환영주의를 포기한 현대예술가들의 창작원리로 부활한다. 중세의 필사본의 미니어처, 중세 성당 안의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와 형태가 현대예술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형과 색이 가시적 대상을 닮을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한다. 데리다의 기표들 역시 초월을 지시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는 시뮬라크르다. 다만 중세의 예술이 가시적 세계의 기호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초가시적 세계를 지시하는 상징었다면, 오늘날의 회화는 이 상징의 차원을 상실하고 순수한 유희가 되어버렸다.
벨쉬에 따르면 데리다는 자기의 사상을 구축하는 시기에 현대의 추상예술, 특히 당시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앵포르멜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앵포르멜'이라는 흐름은 굳이 분류하자면 추상표현주의 계열에 속하나, 미국에서 발생한 '액션페인팅'과 달리 그리기의 행위성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남긴 자취와 흔적에 주목을 한다. 앵포르멜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브 클라인의 신체예술 역시 흔적을 강조한다. 그의 퍼포먼스는 핀젤 대신 물감을 묻힌 신체를 끌고 다니며 바닥에 흔적을 남긴다. 현대예술은 더 이상 가시적 대상을 '현전'시키지 않는다. 다만 우리 눈앞에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흔적의 예술과 데리다의 사상과의 친연성은 명백하다. 데리다에게 의미란 단 한 번의 현전의 체험 속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초월을 포기한 시뮬라크르들 무한연쇄 속에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그렇게 '흔적'이나 '자취'로 존재할 뿐이다.
그 이름이 벌써 암시하듯이 앵포르멜에서는 초기 추상과는 달리 '형태'(form)마저 해체된다. 중세의 장인들의 창작은 '재료'에 기하학적 '형태'를 주는 것이었다. 그 바탕에는 물론 기독교적으로 재해석된 플라톤주의가 깔려있었다. 마찬가지로 재료에 기하학적 형태를 준 초기 추상화가들, 가령 몬드리안의 작품은 비록 가시적 대상의 재현을 포기했으나 재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감각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비가시적 본질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플라톤적이다. 하지만 추상회화가 내용을 해체시켜 형식을 구한다면, 앵포르멜은 이제 그 형식마저 해체시키고, '마티에르'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기서 재료는 형태로 관념화하지 않고 그냥 물질로 남는다. 데리다는 기호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의 기호는 소쉬르의 그것처럼 의식 내적 현상으로 관념화하여 초월적 기의로 승화하지 않고 그냥 공간적, 시간적으로 반복되는 물질로 남는다.
숭 고
"텍스트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명제는 이 세계가 기호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세계, 기호의 체계로 구조화되지 않은 세계, 그 어떤 형이상학으로도 해석되지 않은 세계의 체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결국 실재론과 관념론의 이율배반이라는 의식철학의 낡은 패러다임이 오늘날 언어학적 전회를 거쳐 기호학적으로 변주되고 있는 셈이다. 칸트가 인식을 현상세계로 제한했듯이, 탈근대의 기호학은 유의미한 언표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한계를 시뮬라크르의 현상계로 제한한다. 칸트에게 현상계 밖에 표상될 수는 없으나 사유될 수 있는 물 자체가 존재하듯이, 시뮬라크르의 저편(dehors)에는 언표되거나 표상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저편의 존재를 예감할 때 우리는 숭고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료타르는 재현을 포기한 현대회화를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른다. 숭고의 묘사에는 간접적 방식과 직접적 방식이 있다. 숭고의 간접적 묘사의 예를 우리는 자연의 위대한 힘과 무한한 크기를 인간의 무력함과 왜소함에 대비시킨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숭고의 부정적 묘사의 예는 헤브라이의 신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야훼는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가시적 대상의 모방을 스스로 금지한다. 재현을 포기한 회화, 조성을 파괴한 음악, 의미를 포기한 시, 부조리해진 연극. 료타르에 따르면 이 모두가 숭고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것, 그림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현대예술은 스스로 언어적 묘사와 회화적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19세기까지 회화의 이상은 '아름다운 가상'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의 회화는 '아름다움'도 포기하고, '가상'으로서의 성격도 포기했다. '아름다움'이 더 이상 예술을 이끌어주는 원리일 수 없게 되자, 현대예술은 이제 '숭고'를 지향하게 된다. 료타르에게 현대예술의 본질인 숭고를 구현한 대표적인 예는 버넷 뉴먼이었다. 그의 작품은 평범한 색면회화(color-field painting)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대상의 묘사가 없이 넓다란 색면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색면 회화와 비슷하나, 뉴먼의 작품은 단순히 색의 탐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회화의 본질이라 여긴 어떤 주제(subject matter)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회화의 임무란 호렙 산에서 불타오르는 나무를 바라보며 신을 벗어야 했던 모세의 체험을 매개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앞에서 단순한 공간(space)이 아닌 성스런 장소(place), 즉 마콤(makom: 聖所)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시뮬라크르, 즉 계열적(serial) 작품들은 모든 숭고함의 아우라를 사정없이 파괴한다. 뉴먼의 작품은 그와는 정반대로 이 범속한 세상에서 성스런 아우라의 체험, 형이상학적 숭고의 체험을 매개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앤디 워홀과 버넷 뉴먼의 작품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 대립되는 세계감정의 표현이다. 워홀의 계열적인 작품 속에 원본이 사라진 시대의 감정이 담겨 있다면, 뉴먼의 작품은 시뮬라크르들로 가득찬 범상한 공간을 초월하는 어떤 신성한 장소의 현전을 추구한다. 이 두 개의 세계 감정은 어쩌면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인지도 모른다. 워홀의 시뮬라크르와 뉴먼의 숭고의 대립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사실 관념론과 실재론이라는 두 개의 상호보족적인 철학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의 현상계 저편을 예감하는 유일한 방식은 숭고의 체험인지도 모른다.
재현에서 현시로
근대 철학자들은 낱말의 오용을 막는 것을 철학의 중요한 임무로 생각했다. 낱말의 의미를 일의적으로 고정시키려는 근대 철학의 강박관념은 한 낱말에 단 하나의 의미만을 대응시키려고 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이상언어의 기획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철학을 지배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충동이다. <회화 속의 진리>에서 데리다는 고호의 <구두>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마이어 샤피로와 하이덱거를 함께 비판한다. 언뜻 보면 두 사람의 입장은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작품의 최종적 의미를 고정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데리다는 고호의 구두를 단 하나의 해석에 집어넣지 않고 그 작품 속에 내재된 다양한 해석 가능성들의 놀이를 발동시킨다. 초월의 희망을 포기한 탈근대의 철학자들은 기호작용을 원본과 닮을 의무로부터 해방시킨다. 그 결과 세계는 시뮬라크르의 유희가 된다.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닮음을 전제하지 않기에, 담론은 참, 거짓의 인식론적 기준 대신에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는 창조성이라는 미적 기준을 따라 전개된다.
오늘날 진리는 인식론적 재현(repr sentation)이 아니라 예술적 현시(pr sentation)로 존재한다. 현전의 포기라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멜랑콜리는 이제 창조의 기쁨이라는 미적 낙관주의로 전화한다. 탈근대 철학자들의 글쓰기가 점점 문학을 닮아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는 원본적 재현(representation originaire)이라는 아르토의 잔혹극 원리를 연상시킨다. <쾌락의 활용>은 윤리학을 미학화한다. 데리다의 글쓰기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든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을 토대로 <감각의 논리>를 전개한다. 로티는 "구원적 진리"에 대한 신학적 열망을 "문학적 문화"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볼프강 벨쉬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은 "모더니즘 예술의 정신에서 탄생"했다고 단언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는 현상에 보드리야르는 초미적(trans sthetique)이라는 술어를 부여한다. 철학과 예술은 서로 닮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한다. 오늘날 철학은 예술을 지향하고, 예술은 철학적 해석을 요구한다.
탈근대 문화의 유미주의적 경향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담론의 생산에서 창조적 포텐셜을 갖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니체적 창조의 기쁨에 들뜨기 앞서 먼저 이 모든 미적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두 가지 현상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전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가령 현전의 형이상학을 파괴한 해체주의는 그 언어철학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요구한다. 언어는 세계를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게임과 맞물려 돌아가는 실천의 차원을 배제한 언어철학은 기호학적 형이상학에 빠지게 된다. 이 실천의 차원에 대한 고려가 프랑스의 언어철학에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데리다가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자기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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