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박 수 빈
김소연, 「그래서」(《문예중앙》2012년 가을호)
임재정, 「파이프, 어떤 음식의 형태」(《서시》2012년 가을호)
김경성, 「목기미 해변에 닻을 내리다」(《우리시》2012년 9월호)
조삼현, 「얼굴부조(扶助」(《우리시》2012년 10월호)
윤의섭, 「협연」(《시와반시》2012년 가을호)
자본사회는 인간관계까지 물화를 촉진한다. 실용의 경제논리가 앞서는 이 시대에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식상한 현대인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핸드폰을 끄고 짐승처럼 울부짖고 싶기도 하다. 주변의 상황에 따라 위선과 가면으로 울음을 삼켜야 할 경우는 더 슬프다. 가슴에 바위가 얹힌 듯하고 밥알이 모래알 같을 때 마음에 와닿는 시로 힐링을 하면 어떨까.
시의 본질은 꿈을 꾸고 상상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상황 논리에 의해 시가 그 본질에서 퇴화하면 비인간적인 삶은 더욱 공허해지기 쉽다. 현실과 꿈의 괴리라는 딜레마에 부딪치면서도 꿈의 힘을 상기하는 시인의 고투에 다가가 본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 해설을 하면서부터 좋은 시를 포스팅하는 습관이 생겼다. 인용하는 「그래서」를 햇볕이 들어오는 나의 창에 붙여 놓고 한 철을 보냈다. 외롭거나 힘들 때면 혼잣말로 아래 시의 도입부인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를 읊조리면서 힘을 얻곤 했다.
접속사「그래서」가 이끄는 순행에 집중하며 시를 읽는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 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 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 김소연,「그래서」(《문예중앙》2012년 가을호) 전문
적요한 공간에 화자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낸다니 얼마나 외로운 상황설정인지. 화자가 놓인 풍경의 배후에는 심오한 비의가 있다. 이를 놀라운 통찰력으로 묘사하는 시인의 예리함이 보인다. 찬찬히 “그래서” 이전의 상황을 그려본다. 쓰나미처럼 덮친 슬픔을 겪었나 보다. 이별, 상처, 짐, 두려움... 이런 단어들이 전제가 될 수 있겠다.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는 지쳐 보인다.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된다는 표현에서 무너지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의 묘사는 반주가 아름다운 음악이 떠오를 뿐 아니라 단촐한 시중유화(詩中有畵)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탈주하려는 빠삐용은 끝까지 자유에의 꿈을 버리지 않은 나비의 또 다른 화신일 것이다. 잠에서 깨어, 어린 나를 돌아볼 때면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검은 연민”이 짠하다. 이 시의 묘미는 뒤로 갈수록 집중되어 있다.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라는 부분. 농익은 과일들 가령 포도나 자두 등의 끝물에는 기다림이 농축되어 있다. 아주 달고 검붉다. 미각과 촉각과 시각적인 감각이 처절하다.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듣는 독백은 쓸쓸한 차원을 뛰어넘는다.
좀 더 깊게 이 시를 음미해보면 장을 졸여서 진액만 남듯이 청천벽력 같은 슬픔을 내 안에서 견뎌내는 의지가 있다. 궁극에는 이 시를 더 맛깔나게 하고 독자를 다독여준다. 슬픔을 체에 걸러내어 불순물은 가라앉고 맑은 결정체만 오롯이 남은 과정이 눈에 선하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 “그래서”는 단아한 순접으로서 여기서는 시에 포함되지 않은 앞부분의 생략된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연상하면서 동시에 견주어 읽으면 더 실감난다. 이 조용한 읊조림에 무엇을 켜켜이 저며 놓았기에 읽는 이의 마음을 물들이는지.
조촐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시를 감상하면서 놓치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한다는 표현. 애써 슬픔을 누르고 잔잔하게 서술하고 있는 절제가 느껴진다. 이어지는 시에서도 절제는 미덕이 되고 있다.
내가 빨대를 꽂아 겨눌 때
당신을 점치는 일을 입맛이라 뭉뚱그릴 때
어떤 단내도 곡면 내부를 벗어나지 못할 때
내가 가진 모든 촉감을 쏟아 파이프처럼 텅 비어버릴 때
파이프 속, 당신이 트로이의 일처럼 내 아킬레스로 흘러들 때
이미 온몸이 빨대로 변한 당신은 어떻게 나의 내부를 제 먹을거리로 돌려놓는가
어느 흐린 날
당신은 정말 나를 둘러싼 전부여서
내 구멍을 막고 열면서 피리 불 때
왜 나는 한 옥타브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나, 주르르
손톱을 박은 채 당신을 할퀴고 발등을 찍나
때로 어떤 행동은 생각처럼 은밀하다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불었고 비로소
노래되었노라고
고통이 몸을 갖기 시작한다
- 임재정,「파이프, 어떤 음식의 형태」(《서시》2012년 가을호) 전문
빨아들이는 기능면에서 ‘파이프’와 ‘빨대’는 동일성이 있고 환치된다. 이 시는 음식을 빗댄 지독한 사랑이야기로 읽힌다. 먹고 먹히는 관계로 서술하는 사랑의 속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촉감을 쏟”는다거나 “당신이 트로이의 일처럼 내 아킬레스로 흘러들 때”라는 표현을 봐도 존재들이 서로 뒤섞이고 있다.
시에서 잠깐 인용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신화가 떠오른다. 그리스는 트로이에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그 안에 군인들을 매복시켜 위장하고 승리로 이끈다. 또 이 전쟁 때 용감한 전사였던 아킬레스는 약점인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죽는다. 오늘날 트로이 목마는 컴퓨터 악성 코드의 대명사로 더 유명하며 이렇게 외부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기발하게 시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 역시 도입부에는 “내가 겨누지만” 진행되면서 오히려 당신이 “나의 내부를 제 먹을거리로 돌려놓”는 격이다. 더 나아가 악기로 변주되기도 한다. “내 구멍을 막고 열면서 피리”를 불어 “노래”가 되는 상상력의 전개가 솔깃하다.
“손톱을 박은 채 당신을 할퀴고 발등을 찍” 는 심정은 고통의 절정이다. 이 시는 이율배반과 역지사지를 활용하고 있다. 내가 당신을 겨누었다가 내가 포로가 되는 것과 도입부에서 자유분방한 욕망의 표출이 예상되지만, 꽉 짜여진 구조 속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는 절제된 연기처럼 기대를 뒤집는다. 결국 사랑은 “고통이 몸을 갖”는 것이다. 아픈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다 말하지 않은 뭔가 있다. 은밀히 내장한 시의 엑기스는 감상의 지평을 여는 독자의 몫이겠다. 많은 서술 대신에 오히려 흐름을 생략하고 독자가 생각할 여백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고 있다. 가령 2연의 한 행 처리는 진폭이 크다. 이 시는 보물찾기 하듯이 흘려놓은 단서들의 답을 독자더러 읽으라한다.
깊이 빨아들인 사랑, 서로 엉켜있는 사랑, 내부가 밖이 되고 밖이 내부가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뫼비우스의 띠나 양파의 속성과 닮았다. 이 시는 성애를 직접 기술하지 않았지만 유려하게 에로틱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착잡하게 읽힌다. 사랑의 속성에는 원래 달뜨는 감정에 회한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니 어쩔 수 없나 보다. 화자가 지향하는 말은 의식이 지향하고 있는 바를 의미할 때 이 시는 대상 자체를 넘어서 사랑이라는 대상을 둘러싼 아우라까지를 포괄한다.
내가 당신에게 혹은 당신이 나를 잘 먹고 먹히는 내연(內緣)은 과연 합일의 경지일 것이다. 그러니 종내 “고통이 몸을 갖기 시작하”고 감내하는 것이지 싶다. 나와 당신의 갈등이 맞물려 즉 동병상련이어서 다 읽은 후 독자에게 연민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아픔이 어루만져지고 시가 어렵다.
인간의 가치는 타자와 맺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원만한 관계는 행복감을 주기도 하고 결핍이 사랑의 욕망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 언젠가는 사랑의 시간은 추억이 되고 현실에서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사랑은 관념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다음에 인용하는 시의 도입부도 예사롭지 않다. “끊어진 전선을 목에 걸친 전봇대”에서 앞의 시처럼 서로 이리저리 얽힌 관계의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끊어진 전선을 목에 걸친 전봇대, 백사장에 발목을 묻고 있다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들이 길 위에 떨어져 있다
떨어져서 굴러다니던 말들은 전봇대와 전봇대를 넘나드는 새들의 몫이다
먼 곳의 소식도 그의 몸을 타고 흘러왔고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선단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지금 남아 있는 새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그때의 새가 아니고,
그때의 물이 아니고
지구를 수만 번 돌다가 온 바람만이 그대로일 뿐,
공룡이 발톱을 세워서 써놓은 유적은 느다시 구릉***에서 흘러나온 빗물이거나
암벽 사이로 고개를 내민 금방망이 꽃이라고,
물고기가 산란하는 동안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목기미 해변에 얼굴을 묻은 닻들은 바닷물의 농염에 붉은 꽃이 피고
이따금 목에 걸려드는 해초는
등지느러미가 아름다웠던 물고기의 말을 전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통보리사초밭에 부리를 묻은 검은머리물떼새,
살아 숨 쉬는 것들의 뜨거움이 둥근 목기미 해변을 따라 흘러다니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다
닻의 그림자를 재며 생의 농도을 읽는 목기미 해변,
낡은 전봇대도 모래 구릉에 닻이 된 채
전선을 타고 흘러갔던 것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 서해 굴업도 동쪽 해변
** 굴업도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
*** 지는 해를 늦게까지 바라볼 수 있는 곳
- 김경성,「목기미 해변에 닻을 내리다」(《우리시》 2012년 9월호) 전문
위 시는 여행지에서 느끼는 서정을 수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목기미 해변은 돌과 바람과 모래가 빚어낸 아름다움을 극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사구해변이다.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평원은 절경이며 몽환적이고 신비스럽다. 이 시는 한 폭의 풍경화이다.
화자는 백사장을 걷는다. 전봇대를 보며 오래된 말들이 오고 갔을 것을 생각한다.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들도 생각한다. “지금 남아 있는 새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그때의 새가 아니고,/ 그때의 물이 아니고/ 지구를 수만 번 돌다가 온 바람만이 그대로일 뿐”이라는 부분이 미끄러지는 ‘차연’의 맥락으로 감상할 수 있다. 데리다가 만든 조어인 차연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확정적인 의미맥락을 담지하지 못하고 그 뜻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함과 논리적 확실성으로 무장한 기표라 하더라도 기의는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시에서도 간파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던 의식의 흐름이 “목기미 해변에 얼굴을 묻은 닻들은 바닷물의 농염에 붉은 꽃이” 핀다는 부분에 가면 좀 더 시선을 머물게 한다. 바다에 붉은 꽃이 피는 색채이미지가 도드라지고 대상과 동일시되는 부분이다. “이따금 목에 걸려드는 해초”가 “등지느러미가 아름다웠던 물고기의 말을 전해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구현 역시 감정이입의 대목이다. “통보리사초밭에 부리를 묻은 검은머리물떼새”는 저릿하다. 그것도 “검은머리물떼새”이므로 색채 이미지가 어둡고 가라앉게 한다.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부분에 가면 독자의 동공을 커지게 한다. “사라져버린 사람들”은 예전에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어떤 일들을 꿈꾸고 누리며 지냈을까. 지금은 없는 그 사람들. 소멸의 이미지를 상상해본다. 시인이 시 속에서 다 말하지 않고 나머지 상상력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 같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단순한 회상이나 사랑 같은 퇴행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시는 감상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명자라서 산당화 그 가시내
고등학교 삼 년을 한 반에서 보낸,
입술이 새치름하여
여간해선 흥, 코로 말하던,
하여도 뭇 사내 눈길 잡아챈, 스치면
식전 댓바람에 짠 염소 젖비린내가 나던...
휙- 별똥별의 시간 명멸명멸하다
사그라들고, 세월이 슬어 놓은 살갗벌레
얼굴에 스멀스멀 번지기도 한데
강물의 시간 이마에 흐르기도 한데
순정한 것은 티끌도 닿지 않는 것일까
기억은 항아리 속에 담아둔 오래된 영롱
이젠 성욕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겠다
중년의 허기진 가슴에
입술 안부 자근자근 전할 수 있겠다, 우리 만나
지긋이 포옹하며 서로 등 다독이던,
자기야,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어?
내년 동문회에도 와야 해, 꼭 얼굴 보여줘
안 보이면 슬플 것 같애, 건강해야 해
바람 차웁고 꺼이꺼이
기러기 울며 날던 늦가을 공산성
- 조삼현,「얼굴 부조(扶助)」(《우리시》 2012년 10월호) 전문
명자꽃은 산당화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는 “명자”라는 이름을 가진 동창이야기를 하면서 시적으로 재발견을 하고 있다. 흔히들 못생긴 대명사를 모과나 호박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 꽃들을 보면 참 예뻐서 꽃의 입장이 되어 보면 억울하겠다. 열매를 보아도 얼마나 개성이 있는지 다른 과일들이 모양과 맛으로 뽐낼 때 모과는 향기로, 호박 역시 영양가로 남부럽지 않게 승부를 건다. 선입견으로 굳어진 일반론에서 더 나아가면 새롭듯이 이 시 역시 “명자”라는 이름이 요즘 시대에 약간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 시에서는 의지의 대상이 되어 빛난다.
“흥, 코로 말하”는 시적 주인공의 콧소리가 들릴 듯하다. 화사하고 요염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한눈에 그려지는 주인공은 고등학교 당시 꽤나 인기 있었나 보다. 사람이나 꽃이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개성일 것이다. 가령 찔레나 산당화, 해당화, 장미들은 가시가 있다. 이들이 아름다운 이유도 꽃 색깔과 매혹적인 향기에도 있지만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도도함의 원천인 가시도 한몫을 한다. 연초록의 잎에서 울긋불긋한 꽃으로 열매로 그리고 짙은 갈색의 윤기가 나는 가지 사이로 '뭇 사내‘는 얼마나 설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제는 많은 세월이 흘렀고 “살갗벌레”가 번진다는 표현을 보아 주름이며 잡티가 연상된다. 그러나 기억은 항아리 속에 담아”두어 “영롱”하다. 소중한 추억의 순간이 느껴진다. 아마도 “항아리”에 담긴 추억은 힘들거나 외로울 때 큰 힘으로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추억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 시의 사유는 “중년의 허기”가 드러나는 대목부터 깊어지고 주제로 향하고 있다. 부와 권력 사랑과 명성 등의 여러 욕망으로부터 허탈할 때 위안이 되는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가 있어 “서로 등 다독이”고 품어준다면.......
시간이 흐르는 체감의 속도는 연령을 더 할수록 빨라지는 것 같다. 피곤할 때는 어서 가라 싶다가도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휙 갔다. 이 시는 지나간 시간에 한숨 쉬기보다는 남아있는 앞으로의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살려는 자세가 있다. 세상이 날로 각박해지고 불황의 그늘이 깊어질지라도 “안부 자근자근 전”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덜 외롭게 지내는 일이지 싶다. 기러기는 “꺼이꺼이” 울며 무슨 말을 전했을까.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 우리들이 놓치기 쉬운 사랑과 행복의 말을 전했을 테지.
정서를 감수성의 조화로 이끌기 위해 시인이 “이젠 성욕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겠다”고 피력하는 부분에서 달관이 느껴진다. 젊은 날 벅차오르던 뜨거운 피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지긋이 포옹하며 서로 등 다독”일 수 있는 사이. 격정 뒤에 등 돌리기도하고 그 아픔이 커서 사랑을 두려워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포용하는 관계가 선연하다. 그리하여 동창회에 나와 얼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한자의 뜻처럼 부조(扶助)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성 구별을 떠나 나이가 들면서 마음 나눌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값지게 산 사람이다.
위 시를 읽다가 신경숙의「모르는 여인들」이 기억난다. 거기서도 친구들이 만나 결혼과 상관없이 다시 연애를 한다면? 그 가정법에 까르르 한다. 서술자인 ‘나’ 왈, 연애는 불안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을 한다. 연애를 하면 좋기도 하지만 막연하고 불안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런 감정들도 따라온단다. 연애감정에서 멀어지자 자유로워졌다 한다. 쓸쓸한 자유. 그 자유로 일의 성취를 맛보았고 주변 이성들의 진실과 위선이 객관화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과 사정이 질적으로 다르니까 자기 취향에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가 아니고 싶으면 혼자여야 한다”는 반어적인 전제가 꽂히는 윤의섭 시인의「협연」을 읽어보자.
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달은 혼자 노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건 노을을 타고 흐르는 바람의 플롯과 나무들의 피아노 연주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혼자서는 뭔가 부족했다는 거
독주로는 비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거
혈점을 짚듯 가로등이 켜진다 저렇게 몰두하지 않으면 저녁은 완성되지 않는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묵언수행과 온종일 불 켜진 편의점의 고행에는 신의 가호가 스며있다
그런 거다 혼자가 아니고 싶으면 완벽하게 혼자여야 한다 별은 별로 달은 달로 바람과 나무 사이를 넘나들며 제 갈 길을 운행해야 한다 이 지구에선 쉽게 고독할 수 없다 인간은 좀 더 떨어져 있어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며 이별은 얼마나 가까운 간극이었단 말인가
그러니 나와 취향이 같으면 좋겠어 그건 함께 고독해지는 일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고 산책길 나무는 꼭 고개 들어 올려보고 절판된 책과 담배와 듣지도 않는 레코드를 수집하고 달력에는 절대 메모하지 않고
그건 서로 쓸쓸해지는 일
저녁의 교향곡을 같이 듣는 일
듣다가 차례가 되면 너를 연주하고 너는
나를 지휘하는 일
- 윤의섭,「협연」(《시와반시》 2012년 가을호) 전문
진정한 협연은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고독이 선행되고, 그러한 각자가 다른 고독한 존재와 만나며 이루어지나 보다.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는 절대 고독의 순간을 상상해 본다. 그 다음 별과 노을과 달과 나무와 하늘과 공기의 조화로운 교향곡을 듣는 풍경을 그려본다. 화자가 언술하는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묵언수행과 온종일 불 켜진 편의점의 고행”은 시 속에 오롯이 안치된 소박한 악기이자 액자이다. “그러니”에 이어지는 “나와 취향이 같으면 좋겠어 그건 함께 고독해지는 일”에 주목해 보면 협연이 쉽지 않고 고독을 견뎌야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시에서 말소리의 모든 자질들 가령 휴지, 분행, 구두점들은 모두 서로 깊은 관련성이 있다. 제한된 분량의 발표지면이라 아쉽게도 /와 //로 인용하였는데, 위 시의 의미 단위로 묶인 원본의 행갈이를 연상하며 휴지를 두고 음미하면 더 좋을 듯하다.
1연에서 “바람의 플롯과 나무들의 피아노 연주”를 끌어오다가 2연에서는 독주는 뭔가 부족하다고 하더니 3연은 역설적으로 저녁을 완성하려면 몰두해야한다면서 “묵언수행”과 “편의점의 고행” 을 예로 들고 있다. 정보화가 범람하는 이 사회에서 업무 스트레스며 바쁜 인간관계는 어처구니가 없이 “이 지구에선 쉽게 고독할 수 없”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내 마음이 올곧은 내 마음만이 아니고 탈을 뒤집어쓰고 사느라 그럴 수도 있다. 화자는 고독을 이기고 즐길 줄 아는 경지까지 가고 그 몰입의 경지가 궁극에는 자기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룰 것이며 비로소 저녁이 완성된다고 피력한다. 이렇게 이 시는 “협연”을 다루면서 사실은 거듭 외로움을 말하고 있으니 모순된다 싶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진정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협연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고독의 극복을 언급하고 있으며 만약에 이런 트라우마가 있는 독자라면 힘이 될 것이다.
저물 무렵을 배경으로 가로등이 켜지는 장면을 고독의 “혈점을 짚”는다고 한 표현이 생생하게 와닿는다. 4연에서 화자는 “함께 고독해지”자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협연”은 바로 “듣지도 않는 레코드를 수집하고 달력에는 절대 메모하지 않”는 등의 행위에 있으니 스스로 고독을 택하고 그 절대고독으로 어떤 분야에 집중을 권한다. 고독한 행위들이 모여 “저녁의 교향곡을 같이 듣”는 “협연”은 저 마다의 개성이 어우러져서 아주 장엄할 것이다. 내가 ”너를 연주하고 너는/ 나를 지휘”하는 어울림. 서로의 고독이 승화된 아주 감동적인 작품에 비유할 수 있겠다.
비유적인 표현을 즐기는 이들이 아마 인디언일 것이다. 가령 이 번 1월호를 예를 들어 ‘12월을 지나 새해 1월을 맞았다’를 인디언 식으로 하면 ‘나뭇가지가 눈송이에 뚝뚝 부러지는 무소유(無所有)의 달을 지나 마음 깊은 곳에 얼음 얼어 반짝이는’ 요즘이다. 빛나는 시적 비유에 마음이 머문다.
박수빈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시작.
wing289@hanmail.net
출처 - 우리詩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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