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사막 | 신현락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만 5천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만 5천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 년 동안 처녀의 지평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는 가끔 소금이불을 햇빛에 펼쳐놓기도 한다
지금도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의 여자를 찾아 간다 그러나 소금을 맛본 바람에게 혀를 내맡기다가 대륙을 이동하는 모래의 변종에게 눈을 다치기도 한다 눈 먼 사내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을 때 모래의 여자는 심해의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싱싱한 소금을 그들 앞에 뿌려준다 그렇다고 소금을 한 주먹씩 집어 먹는 건 사막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극소의 미량이라도 한 알의 소금으로 치사량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소금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간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으로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 제 3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품
내가 읽은 시 한 편
조삼현
호흡이 긴 시를 읽다보면 앞에서 읽었던 행간의 길을 잃어버려 이게 무슨 말이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주제를 먼저 드러내고 나서 서술하는 두괄식 문장도 있겠으나 대개의 시편은 마지막 연에 주제가 있음을 주지하고 정독하다보면 신현락의 길이 보인다.
시뿐만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 등 모든 예술은 발단, 전개, 갈등, 절정 또는 서론, 본론, 결론 형식을 이루고 있다. 소금사막 또한 그러하다. 1연을 시를 말하기 위한 모두진술(배경 설명)이라고 한다면 2연과 3연은 전개과정이며, 4연은 갈등 증폭과정, 5연은 갈등구조를 극복하며 엔딩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좀 엇나가, 2000년 이후 한국 현대시는 급속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간의 단순구조를 탈피하여 복합구조로 바뀐 것이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단순구조로도 표현할 수 있었지만 복잡다기해진 현대사회에서는 단순구조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음이다. 또한 선배 시인들이 이미 좋은 시를 많이 썼기 때문에 전인미답의 색다른 시를 요구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시들이 기재나 질료를 많이 등장시키다 보니 시가 많이 복잡해지고 난해해졌으며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신현락의 시가 그렇다.
그렇다면 신현락의 시를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시인이 채용한 기재나 질료는 모두 화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사막이 그렇고 소금이 그렇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타클라마칸 사막 사람들의 생존 과정을 본 적 있는데, 그곳 남자들은 소금을 구하기 위해, 소금을 구해 여자를 얻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속된 묘사 하나를 해보겠다. 혼자서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을 일컬어 ‘독고다이, 라고 하는 그들의 은어가 있다. 그러나 대개는 협업한다. 한 사람은 소리를 질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어깨를 부딪거나 밀어 감각을 분산시켜 바람을 잡은 다음 선수가 쓰~윽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신현락의 시 질료들도 서로 협업한다.
사막은 생존조건이 척박한 곳이다. 또한 소금을 구하기가 힘들다. 사막에서 소금을 찾는 시인의 여정이 고단하다. ‘사막, ‘소금, ‘모래 여자, ‘소금에 중독된 남자, ‘치사량,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는 흰 뼈, 는 시인과 시를 상징하는 도구들인 것이다. 또한 ‘그, 라고 명명한 ‘나, 와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 모두가 화자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재와 질료들이 서로 협업,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기 때문에 시의 깊이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독자와 낯선 숨바꼭질을 한다. 숨바꼭질을 할 때 너무 쉽게 찾으면 재미가 없지 않던가?
그의 두 번째 시집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이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시인의 길이었다면 세 번째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 는 비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인이 찾아가는 모래의 여자가 인생이든 詩든지 간에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가겠다니 시인이여, 시에 중독된 남자여, 그대의 의지가 결연하다. (조삼현)
조삼현
2008년 《우리詩》 신인상으로 등단.
- 《우리詩》2012년 11월호
Turning To Peace - Lisbeth Sc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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