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 / 안도현
7.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연애시절에 애인한테 몇 번쯤 시를 써서 바쳤는지요?”
내 대답은 한결같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내 질문한 사람의 얼굴에는 실망의 그림자가 스쳐간다. 조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시를 연애의 수단이나 사랑을 고백하는 도구쯤으로 여기면 그럴 만도 하다. 젊은 날에는 결혼축시를 써달라는 주문이 쇄도할 때도 있었다. 그렇고 그런, 입에 발린 주례사처럼 매번 쓸 수가 없어서 나는 늘 쩔쩔맸다.
대학 다닐 때 처음 축시라는 것을 쓴 적이 있는데, 첫걸음부터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어렵게 결혼에 성공한 선배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새우젓장수가 되더라도 어떻게든 잘 살 거라고 말이다. 나는 새우젓장수가 되겠다는 신랑의 그 말에 힌트를 얻어 원고지에 축시를 썼다. 그런데 식장에서 시를 읽어내려 가는 동안 신랑과 신부가 훌쩍이기 시작하더니 양가 부모님들까지 손수건을 꺼내드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급기야 결혼식장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사랑과 행복의 언어가 가득해야 할 남의 결혼식장을 거친 인생의 출정식처럼 비통하고 비장하게 만든 것이다. 그 죄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었으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이거야! 혼주와 하객들이 흘린 눈물은 내 시에 대한 최고의 찬사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다. 아직도 그 선배는 그때 쓴 축시를 액자에 담아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한다.)
나한테 공으로 시집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고마워 나는 받자마자 서문을 반드시 읽는다. 한 권의 시집이 지향하는 가치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문 때문에 아예 시를 읽지 않고 책꽂이에 꽂아버리는 시집도 있다. 한 지붕 아래 함께 밥 먹는 배우자와 자식들을 향한 사랑을 서문에 여과 없이 드러내는 꼴이 안쓰러워서다.(전북지방의 말로 하면 식구들한테 야냥개 부리는 것 같아서다. 간살을 떤다는 뜻이다.)
<종교·가족…일체 벗고 어깃장 놓아야>
<반대쪽 선 ‘불화의 순간’ 시는 태어나>
가령 다음과 같은 시집 서문은 어떤가?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의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의 서문이다. 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시인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태도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젊은 날의 방황, 세상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 삶을 바라보는 순정하고 따스한 시선이 독자인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이쯤은 되어야 한다.
시라는 형식, 혹은 시집이라는 형식 속에 가족을 끌고 들어와 챙기고 쓰다듬는 행위는 아무래도 비시적이다. 그런 사랑은 시집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법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중국의 고승 임제(臨濟)의 화두다. 무비 스님은 <임제록 강설>에서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말이고,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말이며,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는 것이다.
일체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야 깨달음에 이르듯 시로 접어드는 길도 그러한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는 절대자와 부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다. 시의 초보자일수록 ‘무엇을 위해서’ 쓰려고 한다. 또 ‘누구를 위해서’ 쓰려고 한다. 시가 천박해지는 순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쓰지 말고, 그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아내를 만나면 아내를 죽여라.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으면서 절을 하면 될 것이요, 예수를 믿으면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를 하면 된다.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 하면 될 것이요, 아내를 사랑하면 한 번 더 껴안아주면 그만이다. 시에다가는 단 한 줄도 절대자의 말씀을 받아 적지 마라. 제발 부모의 자애로움을 칭송하지 말 것이며, 금실 좋은 아내와의 관계를 떠벌리지 마라.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어떻게 하나?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써라. 예수를 팔아 제 잇속을 챙기는 자들을 크게 꾸짖는 시를 써라.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써라. 아내의 쩨쩨함과 실수와 과욕에 대해 써라.
일찍이 김수영은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 부분)
<가족 끌고 들어와 챙기는 건 ‘비시적’>
<종교쪽 마음 가도 몸은 반대로 서야>
시인은 이렇듯 절정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껴서 있어야 하는 자이다. 종교가 진리의 절정에 도달한 정신의 영역이라면 문학은 진리의 위기를 포착하는 풍향계여야 한다. 종교와 문학이 손쉽게 화해하면 둘 다 망한다. 시는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서도 안 되며,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시의 마음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함께 가되, 시의 몸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 그 어깃장, 그 버티는 안간힘, 그 불화의 순간에 가까스로, 시는 태어난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 이성복은 아버지라는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폭력적 질서를 전복하고자 했다. 최승자는 <Y를 위하여> 라는 시에서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라고 노래하면서 이별의 아픔을 정면 돌파한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고 자기 갱신의 기회로 삼는 이러한 태도는 시의 끝부분에 가서 “오 개새끼/ 못 잊어!”라는 결구로 마무리된다. 얼마나 당찬 사랑인가.
“화장품 냄새/ 솔솔 풍기는/ 향기로운 엄마// 뭐든지 척척/ 도와주셔서/ 고마운 엄마// 바른길로 가라고/ 회초리로 찰싹 때리는/ 사랑하는 엄마// 엄마라는 말을/ 부르면/ 목이 메입니다.// 사랑한다고// 말도 떨려서/ 못합니다”(인터넷에서 구한 시,<엄마>)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이 두 편의 동시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시에서 사랑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는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면 다 좋은 시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 하면서 고개를 흔들 것이다. 또 누군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한 마디 보탤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한다고, 제목으로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사랑’이라는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훈수를 할 것이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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