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나는 고요해졌다 / 나호열
이윽고 나는 고요해졌다
삼십 년쯤 불길이 미친 바람처럼 휩쓸고 간 후에
그리고 다시 삼십 년쯤
지루한 장마비가 불길을 덮고 지나간 후에
불의 살과 물의 영혼에서 빠져나온 뼈들은
완벽한 직립의 허무를 보여주었다
이제 시간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폐가의 주인이 되어
주름으로 온몸을 묶은 나를 앞세우고 있다
이윽고 나는 고요해졌다
아무도 나를 보지는 못하리라
아니 혹자는 오늘의 일기장에 이렇게 쓸지도 모르겠다
어느 깊은 산중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탑을 보았다
나는 불교도는 아니다. 그러나 폐사지에서 만나는 탑들은 크
고 작건 간에 적멸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월악산자락 미륵
리 부근에서 만난 獅子頻迅寺터 四獅子 石塔이 내 몸의 어디
쯤에서 기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 아늑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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