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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紀行詩, 그 재미와 함정 / 나호열

by 丹野 2009. 12. 31.

                                                                 뮈엘사원 / p r a h a

 

 

 

                         紀行詩, 그 재미와 함정 / 나호열

 

 

 
 배경숙의 신작시 10 편을 읽는다. 배경숙은 근래에 시집 『사랑할 때 섬이 된다』를 상재 한 바 있는데, 섬 이라는 이격된 공간 속에서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 찬 오늘의 삶을 바라보고 반성하는 실험을 끈질기게 시도하고 있으며, 이 시집은 그의 시업詩業의 지향점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 충분히 주목받을 만 하다 . 그에게서의 '섬'은 찌든 도회지 생활에서의 낭만적 도피처가 아니라 끝내 우리가 도피할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자아 自我이며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가끔은 헐벗기 위해/섬을 찾는다/내가 잊은 것/ 모자란 것/버린 것/ 더 사랑할 것을 위해 /돌아가는 길을 위해/섬을 찾는다

                                     『사랑할 때 섬이 된다』자서

   그러므로 섬이란 상징은 우리에게 꿈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아니면 좀 더 거시적 안목에서 詩 그자체로도 치환될 수 있는 폭 넓은 영역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배경숙은 다른 시인들 보다 명확하게 시의 출발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집 말미의 해설에서 고명철은 '섬 찾기'와 '섬 되기'라는 적확한 표현으로 배경숙의 시를 아니, 모든시인들이 지향하고 고군분투해야 할 시의 사명을 명시한 바 있지만, '찾기'와 '되기'의 통로는 여행이라는 ,일상적 길 찾기와는 다른 일탈적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즉 떠난다는 것은 시공時空을 벗어나서 외계에 자신을 던지므로서 스스로 낯설어지겠다는 행위이다. 낯설어진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내가 잊어버렸던 것, 결핍, 효용의 가치를 상실해 버렸던 것들을 회상으로 복구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워즈워드가 갈파한 '감성의 분출'은 이 세계에 살면서 이 세계의 중심을 꿰뚫어보는 낯설음으로 비롯되는 靈感영감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할 때 시인의 가슴에 옹골차게 들어앉은 경이驚異의 함성은 시인을 어느덧 철학자의 旅程여정에 올려놓는다.

  배경숙의 10편의 시는 위의 간략한 논의에서 벗어나지 않은 선상에 놓여 있다. 그는 중국 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경이를 경험한 것 같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직감적으로 발동하는 감성이 있었기에 수 십편에 달하는 기행시를 생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열대와 아한대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의 40배가 넘는 광활한 대지와 12억이 넘는 인구, 우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역사의 규모 앞에 막막하게 압도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거기에게다가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죽竹의 帳幕 너머에 있던, 조금은 두렵고 떨렸던 미지의 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중국 여행의 첫 기착지에서 느꼈던 중국인들의 <느림>조차도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美國을 경탄과 약속의 땅으로 여기는 것처럼  불과 일 세기 전만 해도 중국은 수 천년 우리 역사의 등을 내려누르던 사대 事大의 상징이었다. 유구한 역사에서 비롯되는 평균적 열등감은 그래서 시인의 감각을 지나친 낭만성으로 기울게 할 위험성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지면을 통하여 발표되고 있는 외국의 풍물을 다루는 기행시들은 아쉽게도 시인이 느끼는 驚異에 함몰되어 스냅화된 감상의 분출이나 단순묘사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겨놓기 일쑤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옛날과 달리 지금은 그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외국여행을 다닐 수 있으며, 영상기술의 발전은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담아올 수 있고 보존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제 기행시는 단순한 현장의 묘사나 계몽을 앞세운 단편적 감성의 깃발을 버리고 새로운 기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숙제를 스스로 가져야 한다고 보여진다. 이는 단순히 기행시라는 좁은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전체에 가해지는 외압과 위기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가 그의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지적한 예술의 속성은 두고두고 음미해 보아야 할 내용이며, 문학 전체에 다가오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거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구체적인 사실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하나 하나의 가치들에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그 사실들을 배열하고 정돈하는 선택작용이다. 예를 들면, 노을진 저녁 하늘을 잘 보려고 몸이나 눈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간단한 예술적 선택작용이다. 예술의 습관은 생생한 가치들을 즐기는 습관이다.    

   시인들은 분명 뛰어난 직관력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사태의 근원을 파악한다. 시인이 시로서 구현하고자하는 것은 가치의 발견이고  고양된 가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의 享受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직관은 그 무엇에도 침범 당하지 않은 순수한 理性의 작용이 아니라 어디엔가 축적된 경험의 냄새가 풍기는 굴절된 직관이다. 기행시 특히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시들은 한국인이라는 특수한 존재성과, 오래 관찰할 수 없고 그 관찰이 肉化될 수 없는 제약된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난점에 봉착하기 일쑤이다.
        
   배경숙의 시들은 그런 점에서 기행시가 갖는 재미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가 『사랑할 때 섬이 된다』에서 보여주는 즉흥적 풍물과 체험이 선행되는 직관적 반성의 튕김이 이번 시들에서는 매우 약화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그 원인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관념 앞에 시인 스스로 압도되어 감성의 불균형을 초래한데에 있지 않은가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디」,「승정자일처」,「진시황제를 찾아서」,「관공」, 「공묘에서」와 같은 시편에서 보이는 계몽적이고 이미지를 포기한 듯한 묘사가 「열 많은 여자」나 「북망산」,「태산」, 「용문석굴에서」,「돌 속에 뜨는 달」같은 시편에서는 말끔이 가셔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앞의 시들이 시에 드러나지 않는 퍼스나에 의존하면서 객관적 진실을 설파하려고 하면 할수록 시의 밀도가 떨어지고 시적 대상이 시인의 삶 또는 인식을 압도하므로서 시인의 반성력을 약화시키고 있는데 반해서 뒤의 시들은 대상을 시인 자신의 삶에 끌어당기고 주체적으로 대상을 소화하므로서 오히려 시를 읽는 즐거움이나 반성적 사유를 고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발표된 시들을 살펴보면 시인이 처음 중국에 발을 들여 놓고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시편들이 들뜬 흥분을 가라 앉히고  점차로 뒤로 갈수록 심리적 안정이 갖춰지면서 대상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찰과  반성의 힘이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부제로 붙은 연작 번호에 따른 필자의 생각이다 - 이 말은 시인이 詩作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 시의 동기가 되는 풍물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객관적 지식과 비판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도 연결이 되는 문제이다. 

  몇 편의 시를 간략히 요약해 보자.

  태산에 오르면서 목도하는 하늘을 향하는 경건성과 오버 랩되는 쓰레기와 오물, 영혼의 성스러움이 靜觀自得- 조용히 생각하면 스스로 얻는다 - 이라는 泰山의 관념으로 이행되는 조용한 아포리즘은 그리 가볍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산이라는 실재에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체득할 수 없는 관념이다. -「태산」

 무생물인 '돌'과 그 돌에 자연적인 물의 흐름으로 새겨진 '달' 그리고 수석을 얻고 좋아하는 현실적 인물인 '김 교장', 이백과 백거이라는 세월 속에 흘러가 버린 과거 속의 인물들이 돌 하나에서 화해하고 대화하면서 오롯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름을 느낄 때의 황홀함이 진경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돌 속에 뜨는 달」 
   
  '북망산'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망자들의 쉼터이다. 북망산은 한국인들에게는 죽음의 상징이지만 북망산은 낙양의 북쪽에 위치한 실재하는 산이다. 보아라! 슬프게 요령 울리며 '이제 가면 언제오나 ' 구슬프던 통곡으로 어머니가 가신 북망산에 와 있는데, 먼지로 자욱한 산 속에는 어머니는 없다. 이 절절한 죽음의 이중부정이라니! 「북망산」

  배경숙의 시편은 대상의 객관화에 기울수록 시의 넓이가 사라지고 오히려 대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때 시의 깊이가 획득되는 풍경을 연출하는데 바로 이 점이 요즈음 발표되는 기행시들의 문제점 또는 지향점을 암시해주는 바이다.    

  배경숙은 이번 신작 특집을 통해서 기행시가 갖는 재미와 지향점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시인에게 있어서 여행은 단순히 관광이나 오락의 치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떠남'에서 '되돌아 옴'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감수성의 훈련이고 시인됨을 자각하는 경이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예쁜 그림엽서의 풍경이나 진귀한 물품의 수집이 아니다. 그 기록은 낯 선 땅 낯 선 곳의 '낯 섬'의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충돌의 기록이고 충돌에서 빚어지는 사건의 묘사이다. 당연히 기행시 속에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질펀하게 깔려야 하고 그 인간들은 인형처럼 시 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면서 시를 읽는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시는 그림엽서만큼 예쁘게 이국의 풍경을 그려낼 수 없다. 시는 두껍기만 한 시간의 두께를 역사책만큼 잘 쓸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앞으로 씌여질, 새롭게 태어날 수 많은 시인들의 시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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