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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 / 나호열
평생을 배워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슬픔
병도 깊으면 친구가 되는데 슬픔
아니다, 아니다 북풍 한설로 못을 박아도 푸르게 고개
를 내미는
젊은 날의 부스럼꽃 토막토막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
는 강물에 피어
미워할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슬픔은 문장이 되지 않
는다
빈 손을 내민다
나전에서 봉평 가는 길에서 마주친 물길
하늘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속살 깊이 그려낸 몇 필의
비단
생살로 또렷이 파고드는 꽃말,
슬픔은 구절구절 꺾이고 젖혀지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2 / 나호열
그대 옆에 가만히 서 본다
보이지 않는……
바람에 기대어 보면
그대는 없고
속 깊은 고목의 흔들림
가끔은 깨닫는다
가슴을 덥히지 못하는
누구의 허수아비인가
문득 떠나보는 사람들
그 넓은 바다
그 무덤, 그 기슭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쓰디쓰게
되살아나고
죄 지은 듯
그대 옆에 서 본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내가 쓰러지지 위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3 / 나호열
-안개에 대하여
가만히 다가서고 싶다.
일년 내내 참았던 눈물 터지듯
이별의 편지를 쓰다 말고 문득 눈 마주치는
가을 숲
키 큰 나무이고 싶다.
그 동안
너무 많은 길과
뿌리지 않은 씨앗의
텅 빈 열매를 찾았던 수고로움
고개 숙이니 마음의 빈 터 가득한데
버리지 못하겠다고
가슴 말라버린 잎새
주먹 쥔 나무들 곁에
느낌표처럼 홀연히
다 벗어버린
서성거림
그러나 나는
끝끝내 잡을 수 없는 그대의
안개
심지를 버린 불꽃이리라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4 / 나호열
나무들 모이면 숲이 되는데
사람의 숲에는 나무가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5 / 나호열
-반쪽의 은행나무에게
아픔을 주고 싶지 않은 사람
눈물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
여름날 해질 무렵 바람처럼 그렇게 싱그러움이 되고
싶은 사람
어느 날 문득 들여다본 당신의 가슴 속에
한개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싶은데
언제 어디서나 밝음과 기쁨과 따사로움이고 싶은데
당신이 제게 주신 말 한 마디, 웃음 한 조각도
당신의 전부도 껴안을 수 있는데
우리
조심씩 사랑하고 조금씩 아파해요
작지만 가장 소중한 보석으로 당신을 가질거예요
제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장 큰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우리
그 제약을 깨트림으로써 어쩌면 기쁨과 자유 대신
슬픔과 굴레를 갖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의 모든 것 가질 수 없다 해서
제가 당신의 일부분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날 온전히 당신께 드릴 수 없다 해도
당신의 의미는 전부 이상이에요
저에게 지금 선악의 기준은 없어졌어요
무엇이 옮고 무엇이 그른지도 알 수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제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부분이 이만큼 이라면
이만큼만 당신을 생각할 거예요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이만큼만 허락되어
었다면
안타깝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체념이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비겁이라고도 생각지는 말아요.
가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가질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을 갖기로 해요
-날이 갈수록 그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6 / 나호열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치솟아 오른
그런 나무보다
등허리가 구부러져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나무를 보면
따스하다
눈물 가득찬 바람 같은 것
텅 빈 허공 어디에라도
기대어 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을 골라
하냥 걸어 빈 몽뚱이조차 무거운
휘어지고 볼품없는 나무가
나의 친구다
죄가 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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