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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나호열

by 丹野 2009. 9. 12.

                                                                        

                                                                                                                               p r a h a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 / 나호열

  

  평생을 배워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슬픔

  병도 깊으면 친구가 되는데 슬픔

  아니다, 아니다 북풍 한설로 못을 박아도 푸르게 고개

를 내미는

  젊은 날의 부스럼꽃 토막토막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

는 강물에 피어

  미워할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슬픔은 문장이 되지 않

는다

 

  빈 손을 내민다

  나전에서 봉평 가는 길에서 마주친 물길

  하늘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속살 깊이 그려낸 몇 필의

비단

  생살로 또렷이 파고드는 꽃말,

  슬픔은 구절구절 꺾이고 젖혀지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2 / 나호열

 

그대 옆에 가만히 서 본다

보이지 않는……

바람에 기대어 보면

그대는 없고

속 깊은 고목의 흔들림

가끔은 깨닫는다

가슴을 덥히지 못하는

누구의 허수아비인가

문득 떠나보는 사람들

그 넓은 바다

그 무덤, 그 기슭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쓰디쓰게

되살아나고

죄 지은 듯

그대 옆에 서 본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내가 쓰러지지 위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3 / 나호열

-안개에 대하여

  

 

가만히 다가서고 싶다.

일년 내내 참았던 눈물 터지듯

이별의 편지를 쓰다 말고 문득 눈 마주치는

가을 숲

키 큰 나무이고 싶다.

 

그 동안

너무 많은 길과

뿌리지 않은 씨앗의

텅 빈 열매를 찾았던 수고로움

고개 숙이니 마음의 빈 터 가득한데

 

버리지 못하겠다고

가슴 말라버린 잎새

주먹 쥔 나무들 곁에

느낌표처럼 홀연히

다 벗어버린

서성거림

 

그러나 나는

끝끝내 잡을 수 없는 그대의

안개

심지를 버린 불꽃이리라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4 / 나호열

  

나무들 모이면 숲이 되는데

사람의 숲에는 나무가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5 / 나호열

-반쪽의 은행나무에게

 

아픔을 주고 싶지 않은 사람

눈물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

여름날 해질 무렵 바람처럼 그렇게 싱그러움이 되고

싶은 사람

어느 날 문득 들여다본 당신의 가슴 속에

한개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싶은데

언제 어디서나 밝음과 기쁨과 따사로움이고 싶은데

당신이 제게 주신 말 한 마디, 웃음 한 조각도

당신의 전부도 껴안을 수 있는데

 

우리

조심씩 사랑하고 조금씩 아파해요

작지만 가장 소중한 보석으로 당신을 가질거예요

제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장 큰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우리

그 제약을 깨트림으로써 어쩌면 기쁨과 자유 대신

슬픔과 굴레를 갖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의 모든 것 가질 수 없다 해서

제가 당신의 일부분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날 온전히 당신께 드릴 수 없다 해도

당신의 의미는 전부 이상이에요

 

저에게 지금 선악의 기준은 없어졌어요

무엇이 옮고 무엇이 그른지도 알 수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제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부분이 이만큼 이라면

이만큼만 당신을 생각할 거예요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이만큼만 허락되어

었다면

안타깝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체념이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비겁이라고도 생각지는 말아요.

가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가질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을 갖기로 해요

 

-날이 갈수록 그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6 / 나호열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치솟아 오른

그런 나무보다

등허리가 구부러져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나무를 보면

따스하다

눈물 가득찬 바람 같은 것

텅 빈 허공 어디에라도

기대어 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을 골라

하냥 걸어 빈 몽뚱이조차 무거운

휘어지고 볼품없는 나무가

나의 친구다

죄가 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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