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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시에 대한 시인의 태도 / 나호열

by 丹野 2009. 2. 9.

 

 

                                      시에 대한 시인의 태도

                                                                          나 호 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간행한 2006년도 版『문예연감』에 따르면 한국문인협회와 민족작가협회에 등록된 시인의 수는 4163명이고 이는 총 등록인원 9061명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문학의 위기가 거론되고 프로슈머 현상- 생산과 소비가 일부 특정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이 일반화되고 있음에도 시인의 길을 가겠다는 열망이 시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김치수가「세계를 향한 한국문학의 발돋움」란 글에서 분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한국인의 심성에는 첨단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시를 쓰고자 하는 무한한 욕망이 솟아나고 있고 그래서 해마다 수백 명의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고 있으며, 그 시를 읽는 독자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싸워야 할 커다란 대상이 사라진 세계에서 또 다른 시적 대상을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적이 없어진 세계에서 눈에 겉으로 보이지 않는 새로운 적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그것이 적이라는 것을 독자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수준의 시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난제를 스스로 떠안겠다는 존재론적 질문에 투지로 맞서는 전통이 굳건하기 때문 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이면에는 이 백 개가 넘는 문학잡지에서 쏟아내는 신인들의 역량과 자질이 한국문학의 전통의 계승과 전향적 발전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반성이 도사리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째든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즉 시의 정의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 따라서 시의 경향은 다양하게 갈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시단의 풍요로움은 ‘시’에 대한 일차적인 정의의 다양성과 더불어 표현의 도구인 ‘언어’의 쓰임새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음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이러한 원론적인 질문에 덧붙여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을 통과하는 의식 儀式을 자각하고 있을 때 진정한 시인은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싸워야 할 커다란 대상은 이데올로기였다. 그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난 뒤 새로운 적을 찾는데, 그것은 한 편으로는 자연환경을 둘러싼 생태적인 고발과 각성이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탈 이성 脫理性에서 빚어지는 감각과 이미지와의 고통스러운 싸움을 말한다. 이 두 종류의 새로운 적은 같은 어미에서 태어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의 분출물이라는 것을 뜻한다. 예술의 본령이 모방과 새로움의 창출에 있다고 볼 때 가시적이고 부동적인 대상의 해체는 ‘새로움’의 의미를 한층 과격하고 추리 불가능한 우연의 영역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우리가 전통적인 시관이라고 일컫는 것은 ‘시’가 주체 (시인)가 세상과 맞닥뜨리는 순간이나 장면을 모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는 것이 주체의 필연적인 반성과 회고이다. 반성과 회고의 표현은 생략과 압축이라는 시의 기본적인 틀을 어긋나지 않는다.

 

 

꼬불꼬불한
머리들이 모여 있다
혹은 웃는 듯도 하고
혹은 우는 듯도 한
그 얼굴들은   
마치 내 동생이
직공생활을 하면서
야간학교를 마치던
마산 어느 공단의 여공들 얼굴 같아서
감히 나는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목줄기가 라면처럼 배배 꼬여진다

마치 내 동생의
피와 살이
내 건강한 폐부로
흘러들어 가는 것
같아서

                     -  이영춘 「컵라면」 전문
 

컵라면은 인스턴트 식품이다. 쉽게, 빠르게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컵라면을 통해서 인간에게는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과 연민이 있음을 말없이 보여주는 시이다.「컵라면」은 퍼소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읽을 때에는 시적 지평을 넓히지 못한다. 가족사 家族史로 이해하는 독자에게 다가오는 가슴의 울컥거림으로만 이 시를 읽을 수 없다. 이 시의 미덕은 생략되고 압축된, 그럼으로써 여백으로 채워진 유추의 고통(?)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로 시에서의 새로움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형태상의 실험이다. 지난 수 십 년간 간헐적으로 몇몇 시인에 의해 시도되었지만 완전한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산문시의 실험이다.

 

 

  무심코 손금을 열고 들여다 본다 무엇이 짓누르는지 가슴이 먼저 소리를 친다 한 움 분량의 빛살처럼 살을 감싸고 묵묵히 지나가는 강물소리가 중심을 밟고 지나간다 맨살의 아픔이 직립으로 견디던 날 기습같은 정전은 내게도 있었다 속수무책 비상구를 찾지 못해 거울 속에서 발 구르며 무표정한 손을 비비던 지난 겨울 바람부는 낯 선 길목을 서성거리며 긴 작문을 썼다 전설처럼 금을 거슬러 올라간 물소리는 속의 작은 창자 떠돌며 오르내렸다 탄탄하게 선을 구축한 자리 마침표처럼 금이 선명하다 아픔을 통해 선은 하나씩 지워져 갈 것이다.

 

 

  임희자의「詩 - 손금을 열고」는 다른 여러 편의「詩」들과 같이 산문시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의 모든 인식이, 현상이 ‘시’ 임을 자각하고 있는 듯하다. 한 지면에 발표된 시들도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부제가 제목이 되는 것이 한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으로부터의 파격이 의미하는 것은 의식 意識의 분열이거나 해체일 것이다. 이승훈이나 정진규의 산문시가 보여주는 공통적인 특성은 의식의 뛰어넘음 - 그러나 이것이 꼭 무의식으로의 함몰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에 있다. 독자의 논리적 상상력의 그물을 벗어나는 영역에서 빚어지는 사차원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 사차원의 세계가 자아의 내면 속에 가라앉아 있음을 실험하는 것이 임희자의 작업이다. 만일 이와 같이 작업이 계속될 것이라면 형태적인 산문 구조의 필연성과 ‘시’의 선연한 정의가 시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영춘과 임희자가 시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도 체험의 내면화와 반성이라는 전통적 시관의 미학을 되살리고 있다면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시의 ‘이야기성’과 오브제의 부각이라는 기법을 활용하는 시들도 있다.

세 번째로 오브제의 독특함과 시적 자아의 의지를 드러내면서 스무 행 이상의 긴 형태를 보여주는 시들이다. 박순선의 「헤밍웨이에게」는 아이러니의 기법을 펼쳐놓은 시이다.

 

 

하바나 바닷가로 가리라
밤바람에 검푸르게 흐느끼는 파도 곁에서
독주를 비우리라 그래서
한 편의 서사시가 된 당신의 삶의 비밀을 캐고 말리라

밤새도록 어부 친구들을 불러놓고
문맹인 그들을 위해
삶이 비록 패배의 싸움이지만
그 패배가 승리의 삶이라고
벗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연극처럼 읽어내릴 때면
갈라파고스의 거북처럼
검고 질기고 주름진 목을 가진
어부들에게서 경의의 눈빛 쏟아지던

아바나 성당에 노벨상의 상금을
전액 기부하며 자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누구에게 주었을 때라며
스스로 충만해지는 것이야말로 생이라고
목소리 짱짱하게 살아오던

아름다운 서사시 한 편을 베끼고 말리라
그리고 햇살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바나 바닷가 물살들의 숨소리와 함께
당신의 삶의 서사시 제단 위에
내 몸 가만히 놓으리라

 

 

 지나친 추리일지 몰라도 시의 퍼소나는 하바나 바닷가로 가거나 삶의 서사시 제단 위에 내 몸 가만히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력한 의지의 표명은 그만큼 현실적 신고 辛苦를 암시한다. 헤밍웨이는 어떤 사람인가? 세계적인 소설가의 명예를 안았으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스스로 소설의 주인공이 된 사람이다. 이 세계는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프로이드가 작가들을 정신병을 지닌 존재로 파악한 것이 너무 획일적이고 모험적인 판단이라고 매도할지라도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꿈 사이를 넘나들면서 자아의 분열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자살에는 해명이 없다. 주인공이 사라져 버린 세계는 얼마나 광대한가, 허무한가!

 

시 「헤밍웨이에게」는 쉽게 읽힌다. 절실한 話者의 외침은 단호하고 직설적이다. 이 시를 반어법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의지의 표현이 있음에도 화자의 의지가 쉽게 실현될 수 없는 것 이거나 비극적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바나 바닷가 물살들의 숨소리와 함께 /당신의 삶의 서사시 제단 위에/ 내 몸 가만히 놓으리라’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자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 삶인가 아니면 죽음인가?

 

  네 번째로 새로운 실험의 형식을 보여주는 시로서 일상적 세태의 이야기성 묘사와 구조를 가진 시들이다.

 

  내 아이디는 봄날이었다가 모카향기였다가 아름다운이었다가 달마시안 하얀 지우개 였다가 크레파스였다가 한다

 

  가끔 나도 기억 못해서 내 정보를 쿡 찍어보다가 조금 웃기도 한다 아름다운이란 안 어울리는 아이디는 사실 남의 아이디의 도용이다 그리 아름답다곤 할 수 없지만 젊고 패기 있는 초등교사 이혼녀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와 난 짧은 여행을 했다 천리포도 갔고 살갗을 함께 태우기도 했고 아주대 앞 또 다른 이혼녀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감자탕을 먹기도 했었다 그 뿐이었다 그녀가 스친 것은 그리고 난 지금 아름다운이 되어 있다

 

  때로 못을 혼자 박는 쓸쓸함 따위 사기로 곰팡이 드는 셋집을 얻는 일 따위 교직원 사이에서 학부모들 사이에서 간혹 망연해지고 있을 그녀의 아름다운 아이디여 또 다른 그녀의 아름다운 아이디가 엄마 잃은 사슴을 닮은 하얀 뒷덜미가 오늘은 보고프다

                                      

                                                   박미경 「아이디 이야기」전문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실험은 불확정적이고 부조리한 삶의 편린들의 충동과 충돌을 그리면서 산문시를 한결 난해한 지경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박미경의 산문시「아이디 이야기」는 인터넷 시대의 가명성과 그 속에 들어 있는 관계의 허물어짐이 계단적 구조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름은 불리워지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의 이름은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디는 스스로 만든 가공의 이름이다. 불리우기는 하지만 나는 항상 가상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아름다운’은 아직 가공되지 않은 미완성의 여행자이다. 명사名詞가 존재하는 한 어디든 붙어 있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그 명사에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이름. 그 이름은 분열하고 도용되고, 복제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시가 주제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 할 수도 있겠고 시인이 내린 시의 정의에 따라 주제를 다루는 방법으로서 형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금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시의 정의에 앞서서 언어를 감정이나 현상의 묘사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태도를 버릴 때 언어의 미감은 한결 그 색채를 영롱하게 띄게 될 것이다. 언어 - 모국어-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시의 정의를 새롭게 만든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시의 정의를 새롭게 만드는 혁명적 존재가 아닐까.